한국일보

곰의 포효

2018-12-25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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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치’는 닥터 수스가 만들어낸 대표적 캐릭터의 하나다. 그는 ‘누가 크리스마스를 훔쳐 갔을까’라는 작품으로 특히 유명하다. 인간을 증오하고 놀부 뺨치는 심술보를 가진 그는 크리스마스를 특히 싫어한다. 멀리서 들려오는 크리스마스 캐롤 소리에 분노한 그는 산타로 변장하고 마을로 들어가 모든 크리스마스 선물을 훔쳐 산 속에 버린다.

이제 크리스마스는 끝났다고 기뻐하고 있던 순간 마을에서는 다시 캐롤이 울려 퍼진다. 사람들은 절망하는 대신 노래를 부르며 서로를 격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감명 받은 그린치는 개과천선하고 선물을 모두 돌려주며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줄거리다.

올겨울 주식 투자가들은 도대체 누가 크리스마스 전날 주식을 모두 훔쳐 갔을까 궁금해 하고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653 포인트 떨어지며 22,000 밑으로 내려갔다. 크리스마스 전날 기록으로는 역사상 최악이다.


미국 500대 기업을 대표하는 S&P 500 지수나 하이텍 기업이 많이 몰려 있는 나스닥은 이미 최고치에서 20% 이상 떨어지는 ‘곰 장세’(bear market)에 진입했다. 미국 증시는 12월 기록으로는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1년 이후 최악이다. 이로써 2009년 이후 9년 넘게 계속되어오던 ‘황소 장세’(bull market)도 끝났다.

올 초까지 만도 주식은 상승에 상승을 거듭하며 투자가들을 즐겁게 해줬다. 다우존스 주가 지수가 자기 취임 후 30%이상 오르자 트럼프는 이를 자신의 공으로 돌리며 희희낙락 했다. 그러던 주식이 왜 갑자기 이렇게 떨어진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세상의 이치다.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 아니 그 훨씬 전부터, 끝나지 않은 좋은 시절도, 나쁜 시절도 없다. 장기 호황이 계속되면 사람들은 ‘이번만은 다를 것”이란 착각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 주가의 척도를 재는 전통적인 기준들은 무시되기 시작한다.

올여름 아마존 주가 총액이 1조 달러를 돌파했을 때 소득에 대한 주가 비율(PE)은 150이 넘었다. S&P 500 지수의 역대 평균이 14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이는 2000년 닷컴 버블이 한창일 때나 볼 수 있는 수치였다. 아마존 주식이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추락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아마존과 함께 지난 수년간 주가 상승을 선도해 온 다른 ‘FAANG’ 주식(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넷플릭스, 구글)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러지 않아도 내려갈 이유를 찾고 있던 주식시장에 트럼프의 무지하며 경솔한 발언은 기름을 부었다. “무역전쟁은 좋은 것이며 이기기 쉽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중국이 쉽게 굴복하고 무역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란 그의 주장과 달리 미중 간 무역분쟁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주가폭락을 부채질한 것은 그의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 의장 경질 발언이다. 현 제롬 파월 의장은 트럼프 자신이 FRB를 이끌 적임자라며 임명한 인물로 취임한 지 1년도 채 안 된다. 그런 사람을 금리를 계속 올린다는 이유로 호황의 적으로 몰더니 최근에는 해임 가능성까지 거론한 것이다.

주식시장은 금리인상도 좋아하지 않지만 중앙은행이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것은 더 싫어한다. 트럼프 이전 대통령들이 FRB에 대한 발언을 자제한 것도 그 정치적 독립성을 해치는 것이 미국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파월 해임 가능 발언 후 주가가 폭락하자 스티브 무느신 재무장관은 대통령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며 진화에 나섰으나 주가 하락세는 멈추지 않고 있다.

제2차 대전 후 주식의 ‘곰 장세’는 한번 시작되면 평균 13개월간 지속되고 회복하는 데는 거기서 다시 22개월이 걸렸다. 그러나 주식은 기차가 아니다. 평균이 그렇다는 것이지 3년 후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1929 대공황 때는 26년, 70년대 불황 때는 16년 걸렸다.

주가 폭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내년 불황으로 이어지느냐 여부다. 아직까지 대다수 견해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보지만 주식이 계속 더 떨어지면 상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불황에 대비해야 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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