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주 공화당의 몰락

2018-11-20 (화) 민경훈 논설위원
작게 크게
1994년 재선을 앞두고 있던 피트 윌슨 당시 가주 지사는 낮은 지지율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 주지사 후보인 캐슬린 브라운에게 20% 포인트나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대로 가면 패배가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이 때 나온 것이 불법체류자에게 모든 교육, 의료, 복지 혜택을 박탈하는 프로포지션 187이었다. 당시 많은 가주민들은 나날이 늘어나는 불법체류자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윌슨은 자신이 당선되면 모든 가주와 지방정부 공무원의 불법체류자 신고를 의무화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렇게 되면 학교 선생들은 불법체류 학생 색출 요원으로 전락하고 병상에 누워 있는 불법체류자들은 모두 거리로 내몰릴 판국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반이민 감정을 계속 부채질했고 그 결과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다.


개인적으로는 선거에서 이겼다고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가주 공화당으로서는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전통적으로 가정의 가치를 존중하며 공화당 성향이 강했던 라티노와 아시안이 공화당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윌슨은 자신이 지지한 3선 금지법 규정 때문에 다음 선거에는 나가지 못했고 주민발의안 187은 나중에 연방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아 시행해 보지도 못하고 폐기됐다. 고작 자기 임기 4년 더 늘리자고 가주 공화당 앞길을 막은 것이다.

올 중간선거에서 가주 공화당은 몰락했다. 공화당의 아성 중 아성인 오렌지카운티에서 전패하고 경합 지역으로 불리던 연방하원 선거구 6곳이 모두 민주당 승리로 끝났다. 투표 당일 3,000여 표를 앞서 가던 영 김 후보는 부재자 우편투표에서 3,000여 표나 뒤지자 지난 주말 결국 패배를 시인했다.

이에 앞서 민주당의 케이티 포터는 공화당의 미미 월터스를, 민주당의 할리 라우다는 공화당의 데이나 로러바커를, 민주당의 케이티 힐은 공화당의 스티브 나이트를, 민주당의 조시 하더는 공화당의 제프 덴험을 꺾었고 민주당의 마이크 레빈은 공화당의 대럴 아이사가 은퇴하며 빈자리를 차지했다. 이로써 민주당은 가주 내 연방하원 의석 53개 중 45개를 가져갔고 전체 하원 의석수는 38석이 늘어나게 됐다.

원래 오렌지카운티는 공산주의와 높은 세금을 싫어하고 가정의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파 기독교도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그러나 70, 80년대 들어 월남 보트피플, 한인과 라티노 이민자들이 몰려들면서 성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가 처음 감지된 것은 1996년 선거다. 그 해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라티노 여성 로레타 산체스가 동네 터줏대감이자 백인 보수파의 상징 밥 도넌을 물리쳤다. 1994년 통과된 주민발의안 187에 분노한 라티노들이 대거 몰려나와 산체스를 밀어준 것이다.

그럼에도 가주 공화당은 변화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보수 백인의 이익을 대변하고 소수계와 이민자를 멀리 했다. 그 결과가 이번 중간선거다. 가주 공화당은 연방하원에서 참패한 것은 물론 가주 주요 공직선거에서 모두 지고 연방상원은 아예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가주 의회는 민주당이 2/3를 장악하는 바람에 공화당은 모든 발언권을 상실했다.


전 주하원 공화당 원내 총무였던 크리스틴 올슨은 “가주 공화당은 현 상태로 구제 불능”이라며 “유독성 있는 전국 공화당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해 죽었다”고 말했다. 가주 공화당 의장을 지낸 숀 스틸도 가주 공화당은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고백했다.

가주는 이미 텍사스, 하와이, 뉴멕시코, 네바다와 함께 소수계가 다수인 5개 주의 하나다. 앞으로 20여년 후인 2040년대가 되면 미국 전체가 소수계가 다수인 나라가 된다. 그런 상황에서 툭 하면 멕시칸을 갱단과 강간범, 살인마로 모는 도널드 트럼프를 지도자로 모시는 공화당이 설 자리가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하다. 그럼에도 공화당원의 87%가 트럼프를 지지한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주는 원래 리처드 닉슨과 로널드 레이건 등 미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공화당 정치인을 배출한 곳이다. 인구도 미국에서 제일 많고 경제규모로 따져도 독립국가라면 세계 5위의 대국이다. ‘가주가 가는대로 미국이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공화당이 지금처럼 백인 우월주의자를 옹호하고 소수계와 이민자, 여성을 비하하는 트럼프 같은 인물을 리더로 택한다면 공화당의 미래는 없다고 봐도 된다. 공화당의 대오각성을 빈다.

<민경훈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