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 운길산에 있는 수종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절의 하나다. 무서울 정도로 가파른 산길을 따라 이곳에 오르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져 유유히 서쪽으로 흐르는 광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서거정이 “동방 제일의 전망”이라고 했다는데 허튼 말이 아니다. 두 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는 조선 후기 최대 학자인 정약용의 고향으로 그도 이곳에 자주 와 차를 마시며 초의선사와 담소했다 한다.
이 절이 생긴지는 오래 되지만 새롭게 창건한 이는 세조다. 극심한 피부병을 앓고 있던 세조가 1458년 금강산에 들렸다 오는 길에 이곳에서 묵었는데 한밤중에 굴속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종소리처럼 들리고 근처에서 18 나한상이 발견돼 여기 절을 중창했다 한다. 수종사라는 이름도 그렇게 지어진 것이다.
세조는 이곳에서 흐르는 강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1453년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지 5년이 됐지만 그 전해 끔찍히 아끼고 후계자로 지목했던 장남이 스무살에 갑자기 숨졌다. 일설에는 단종의 생모가 꿈에 나타나 아들의 복수를 하겠다며 침을 뱉자 온몸에 등창이 나고 곧 이어 맏아들 의경 세자가 죽었다 한다. 그 뒤를 이은 둘째 예종도 즉위 1년 만인 20에 죽고 외동딸도 자식 없이 37살에 죽었다. 세조 또한 왕이 된 지 13년만인 50에 악몽과 질병에 시달리다 사망한다.
불교에서는 죄를 지은 자는 결국 벌을 받게 돼 있다고 가르친다. 조선은 이성계의 쿠데타로 시작되고 태종 이방원도 그렇게 권력을 잡았지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백성과 군사를 무리한 전쟁으로부터 구하겠다는,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인 이방원은 자신이 후계자여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친형들이 난을 일으켰지만 방원은 이들의 생명은 보존하는등 자제심을 보였다.
그러나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달랐다. 집권을 위해 친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친동생인 안평과 금성대군을 죽이고 단종을 지켜달라는 선왕의 유지를 받든 충신 수백명을 고문하고 살해했다. 머리와 사지가 찢겨나가는 거열형에 처해진 사람만도 수십명에 달하며 이들의 딸과 아내는 첩과 노비로 공신들에게 나눠줬다.
단종을 두메산골인 청령포로 유배보낸 뒤 죽인 것도 모자라 그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까지 내렸다. 그러나 이 고을 유지이자 호장인 엄흥도는 이를 어기고 시신을 수습한 후 화근을 피하기 위해 후손을 전국 각지로 피신시킨다.
그의 행동은 이보다 2천여년전 쓰여진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닮아 있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가 테베 왕 자리를 물러난 후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니케스 사이에 내전이 벌어져 둘 다 사망하고 오이디푸스의 처남 크레온이 왕이 된 후 폴리니케스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그의 시신을 묻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그의 누이인 안티고네는 ‘인간의 법 위에 신의 법이 있다’며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의 시신에 흙을 뿌리고 장례를 치러준다. 이를 안 크레온은 대노하고 그녀를 동굴에 가둔 뒤 생매장하려 한다. 그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약혼자인 하에몬은 이에 반대하며 아버지와 싸우다 자살하며 크레온은 예언자 티레시아스의 경고를 듣고 안티고네를 살리려 하지만 그녀 또한 자살한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은 크레온의 아내 에우리디체는 남편을 비난한 뒤 자살하고 크레온은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운다. 합창단이 신은 오만한 자를 벌하며 징벌은 지혜를 가져온다고 노래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단종과 엄흥도 이야기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 ‘왕과 사는 남자’가 동원 관객 1천600만을 넘었다. 한국 영화 중 이를 능가한 것은 ‘명량’과 ‘극한 직업’ 둘뿐이다.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영화가 이처럼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일까. 엄흥도, 단종, 한명회를 연기한 배우들의 공도 분명 있다.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윤석열의 어설픈 쿠데타를 극복한 한국 국민들의 정서가 단종의 억울함과 엄흥도의 용기에 감응한 부분이 컸을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경제 성장의 과실은 기성 세대가 고스란히 가져가고 자신들에게는 남겨주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 단종의 처지를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분석이다. 지금 한국과 미국, 유럽을 막론하고 전세계 부의 대부분은 60대 이상이 차지하고 있다. 반면 젊은 세대들은 비싼 가격으로 자기 집 마련이 힘들고 AI까지 등장하며 취직도 어려워지고 있다.
한민족 최대 영웅을 소재로 한국인 의식 깊숙히 깔린 반일 정서를 자극한 ‘명량’, 아침부터 저녁까지 허덕허덕 뛰어도 먹고 살기 힘든 500만 자영업자의 비애를 코믹하게 그린 ‘극한 직업’까지 많이 보는 영화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왕사남’의 인기도 시대적 정서를 정확히 짚었기 때문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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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