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자연의 친구’의 백세 인생

2026-05-05 (화) 12:00:00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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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는 침팬지를 제외하고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다.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언어 학습 능력이 있으며 웃고 상심하기도 하며 과거와 미래를 구분할 줄 안다. 인간과 고릴라의 DNA는 최소 96%가 일치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고릴라는 서부 저지대, 동부 저지대, 동부 산악 고릴라 세종류로 모두 멸종 위기종으로 분류돼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동부 산악 고릴라다. 서부 고릴라는 아직 30여만 마리가 있지만 르완다와 콩고 일대의 산악 고릴라는전쟁과 밀렵, 서식지 파괴로 70년대 300마리까지 줄어들었다.

자칫 지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를 이들 고릴라를 연구하기 위해 1966년 아프리카의 오지로 달려간 사람이 있다. 고고인류학자 리처드 리키의 권유로 고릴라에 인생을 걸기로 한 다이앤 파시다. 원래는 고릴라 연구가 주목적이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고릴라들이 밀렵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살해되는 것을 본 그녀는 동물 보호 운동가로 변신해 총을 들고 밀렵군을 직접 체포하는 것은 물론이고 집에 불을 지르고 아이를 납치하는등 극단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때 그녀에게 영국의 한 동물 다큐멘터리 제작자로부터 연락이 온다. 자연 상태에서 고릴라들의 실상을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이를 수락한다. 이 제작자의 이름은 데이빗 아텐버러였다.

1978년 그녀의 안내로 고릴라 집단과 마주한 아텐버러는 근접 촬영을 위해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아기 고릴라 한 마리가 누워있는 아텐버러의 배 위에 올라앉고 엄마 고릴라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의 고개를 돌려 눈을 정면으로 응시한 것이다. 사납고 흉폭한 것으로 굳어져 있던 고릴라의 이미지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텐버러는 훗날 이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특권을 누린 순간의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이 장면은 1979년 자연 다큐멘터리 중 가장 성공적 작품의 하나인 ‘지구의 생명’ 프로그램을 통해 5억명에게 전달됐다. 고릴라 보호 운동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산악 고릴라들은 정부와 운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제는 1천마리 이상으로 늘어났다.

1954년 ‘동물원 탐사’라는 프로로 동물 다큐멘터리와 인연을 맺은 아텐버러는 그후 70여년 동안 ‘지구의 생명’ 프로 이후에도 ‘혹성 지구’, ‘푸른 혹성’, ‘얼어붙은 혹성’, ‘살아있는 혹성’, ‘포유류의 삶’, ‘새의 삶’, ‘냉혈동물의 삶’ 등 수많은 시리즈를 만들어 내며 동물 다큐멘터리 1인자의 자리를 확고히 지키고 있다. 2006년에는 영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유명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내용도 충실하지만 무엇보다 뛰어난 영상미로 시청자들을 압도한다. 특히 고화질 기법으로 찍은 ‘혹성 지구’(Planet Earth) 이후 작품들은 한 컷 한 컷이 예술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다. 그가 영국 아카데미 필름 TV상을 흑백, 칼러, HD, 3D, 4K등 부문에 걸쳐 다섯번 받은 유일한 사람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영국의 ‘국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여왕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았다.

그가 동물 프로그램만 만든 것은 아니다. 1969년 BBC2 방송 제작자로 있으면서 제작한 케네스 클라크의 ‘문명’과 제이콥 브로노우스키의 ‘인간의 상승’등은 TV 역사에 남을 명작들이다. 그는 BBC 방송 총책임자 물망에도 올랐으나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에 전념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 두고 프리랜서 자격으로 인도네시아로 가 1973년 ‘동쪽으로 간 아텐버러’라는 프로를 만든다. 그후 50여년간 그의 삶은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쓰여졌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그가 오는 8일로 100회 생일을 맞는다. PBS는 이를 기념해 6일 저녁 ‘지구의 생명: 아텐버러의 가장 위대한 모험’(Life on Earth: Attenborough’s Greatest Adventure)을 내보낸다. 이 작품은 600종의 생명체를 알린 기념비적인 시리즈를 돌아보고 여기 사용한 필름 촬영 기법을 소개한다. 아텐버러와 촬염을 함께 했던 제작진 인터뷰, 장장 3년에 걸쳐 40개국을 여행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놀라운 것은 100세를 앞두고 있으면서도 젊은이 못지 않은 그의 체력과 정신력이다. 화면에 나와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100세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 세계 오지를 돌아다녔으면서도 이토록 정정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는 건강을 위해 채식 위주로 먹고 소, 돼지, 양 등 붉은 고기를 거의 섭취하지 않는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이게 건강 비결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는 은퇴 의사를 묻는 질문에 “석탄을 퍼나르며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면 그만두겠지만 나는 가장 놀랍고 흥미로운 것들을 보러 세계를 돌아다닌다”고 일축했다. 그의 건승을 빈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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