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18년의 라티노 표밭

2018-11-01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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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선거를 겨냥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은 초강경으로 치닫고 있는데 ‘분노로 불타오를 줄 알았던’ 최대 이민그룹 라티노 표밭의 투표 열기는 별로 뜨거워지지 않고 있다.

선거가 임박해지면서 급해진 것은 이민표밭의 절대 지지를 승리 요건의 하나로 기대했던 민주당이다. 민주당 의회캠페인위원회가 어제부터 라티노 표밭을 대상으로 5개주 8개 도시에서 TV광고 공세에 돌입했다. 막판 투표율 증가를 위한 50만 달러짜리 투자다.

라티노 표밭은 계속 가파른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다. 금년 중간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는 라티노 유권자는 약 2,900만명으로 미 전체 유권자의 13%를 차지한다. 지난 10월15일 발표된 퓨리서치센터의 분석결과다. 2014년 중간선거 때보다 400만명이, 2016년 대선 때보다 200만명이 늘었다. 60% 이상이 캘리포니아, 텍사스, 플로리다, 뉴욕 등 4개주에 거주하지만 노스다코타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오리건 등 전국 광범위한 지역에서의 증가율도 상당히 높다.


이민 밀집지역의 주 선거는 물론 상당수 연방의회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규모다. 코크재단의 기금으로 운영되는 보수성향 리브레연구소가 이틀 전 발표한 보고서도 연방 상·하원과 주지사를 뽑는 22개 선거에서 “라티노 유권자가 승패를 좌우할 것”으로 전망했다.

유권자의 ‘기록적 상승세’가 정치적 힘을 발휘하려면 투표율 증가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라티노의 투표율은 상당히 낮다. 2014년 중간투표의 경우, 27%로 백인 투표율보다 거의 20포인트나 낮았다. 2016년에도 그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2016년 라티노 투표율이 백인과 비슷했더라면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이 되었을 것”이라고 인디애나대학 정치학교수 버나드 프레가는 그의 신간 ‘투표율 갭’에서 지적했다.

민주당에게 라티노 표밭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라는 전문가들의 경고가 이어져 왔다. 금년에도 라티노의 투표율 저조는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다. 수백만 라티노가 선거 때마다 신규 유권자가 되지만 상당수는 투표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원래 투표율 낮은 저소득 젊은 층의 신규 유권자가 많은 것이 한 가지 이유다. 2018년 라티노 표밭의 60%는 45세 이하로 집계되었다.

트럼프 공화당에 대한 분노와 다수당 시절 이민개혁에 실패한 민주당에 대한 좌절이 합쳐져 정치가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무력감이 무관심으로 바뀌면서 적극 투표 아닌 기권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정치가들은 멕시코나 미국이나 똑같다…하루 종일 일해야 사는 내게 투표는 시간낭비다”라고 28세 라티노 청년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라티노들이 분노하여 투표할 것이라고 말하고들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와는 상관없다’고 외면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정치학자 리사 베도야도 전한다.

라티노 표밭은 단일화된 하나의 보팅 블럭이 아니다. 성향도, 계층도 다양하다. ‘이민’이 라티노 표밭의 최우선 이슈이지만 주요 관심사의 전부는 아니다. 일자리와 임금인상, 헬스케어와 교육도 못지않게 중요한 이슈이며, 2~3세 표밭이 늘어나면서 대부분 1세들의 무조건 민주 선호에서 벗어나는 추세 또한 역력하다.


라티노 표밭의 민주당 성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월스트릿저널의 9월 여론조사에 의하면 64% 대 21%로 민주당 선호도가 공화당 선호도보다 훨씬 높다. 그러나 트럼프에 대한 반감이 민주당 투표로 직결되고 있지는 않다.

민주당의 평소 라티노에 대한 아웃리치 노력의 부족도 지적된다. “언제나 선거 직전은, 라티노 유권자들이 신데렐라처럼 저학력·저소득의 말썽 많은 인구집단에서 기대에 찬 표밭으로 바뀌는 순간”이라고 워싱턴포스트는 비유했다. 별 노력도 안하고 라티노 표밭이 “잠에서 깨어난 거인처럼 민주당에 행운을 선사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라는 충고다.

그래도, ‘이민’이 선거의 핵심이슈로 달아오르고, ‘반이민’이 대부분 공화후보들의 공약으로 외쳐지고 있는 금년은 다를 것이라는 민주당의 낙관론은 아직 유효하다. 그 어느 때보다 분노지수도 높고 투표참여 캠페인도 활발하다. 퓨센터의 조사에서도 라티노 성인 66%가 “트럼프 취임 이후 미국사회에서 라티노의 입지에 대해 심각히 우려한다”고 말했고, 52%가 이번 선거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다. 2014년엔 35%에 그쳤던 대답이다.

이민을 희생양으로 삼는 트럼프의 초강경 드라이브가 선거판을 뒤흔들고 있다. 단순한 공약이 아니다. 지난 2년간 극단적 공약들이 국가의 정책으로 강행되는 것을 이민사회는 목격해 왔다. 국경에서 어린자녀와 부모가 격리되고, 수십만 드리머들이 벼랑가로 떠밀렸으며, 합법이민자들의 복지혜택이 위협받고 있다. 이번 주엔 미국태생 자동 시민권제도를 폐지하겠다는 경고까지 나왔다.

이젠, 이민사회가 강력한 메시지로 반격을 가해야 할 때다. “증오의 말이나 폭력이 아닌 투표로 가하는 반격”이다. 먼저 라티노 표밭이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들의 투표율 급증 없이는 성공하기 힘든 반격이기 때문이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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