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캐버노의 대법원’

2018-10-11 (목) 박 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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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전국을 뒤흔든 양극화 인준 폭풍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은 브렛 캐버노가 대법관으로 첫 발을 내딛으며 연방대법원의 확고한 보수시대가 열리고 있다.

새 대법관을 맞은 9일 대법원 안팎은 조용하고 평온했다. 삼엄한 경비에 소수의 시위대는 일찌감치 철수했고, ‘정숙’을 경고 받은 방청객들로 가득 찬 이날 법정의 심리는 캐버노에게 “길고 행복한 커리어를 기원한다”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의 따뜻한 환영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문 닫힌 회의실 안에선 날선 법적 논쟁으로 서로를 공격해도, 회의실 밖에선 돈독한 우애를 보여 온 ‘대법원 패밀리’의 일원으로 합류한 캐버노는 DC 항소법원 12년 베테랑 판사답게 10여 차례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간간이 웃기도 하면서 무난하게 첫 날을 마무리했다. 지난 석 달, 특히 지난 3주 격렬한 인준전쟁의 그림자는 찾기 힘들었던 하루였다.


법정 안과는 달리 캐버노 대법원 입성을 둘러싼 앞날의 기류는, 그러나 별로 평온해 보이지 않는다. 소용돌이를 예고하고 있다.

2,400명 법학 교수들이 ‘부적합한 자질’을 들어 인준을 반대하는 서한에 서명케 한 그의 ‘한 성질’이 온 천하에 TV로 생중계되고, 고교시절 성폭행 미수 의혹이 남아있는 채로(FBI 수사는 그의 유죄 입증도, 무죄 입증도 하지 못했다) 대법관이 된 캐버노가 결정 표를 던질 핫이슈의 5대4 보수 판결은 그 정당성을 의심받게 될 것이다. 극단적인 양극화와 정치화에 휘말린 이번 인준과정이 이런 의구심을 키우면서 대법원의 권위와 신뢰에 대한 도전이 늘어날 것이다.

당파적 양극화는 존 로버츠 대법원이 가장 경계해온 부분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이 2005년 취임 초부터 최우선 순위로 강조하며 다짐한 것이 ‘대법원의 이념전쟁 종식’이었다. 하버드 법대 학장을 역임한 엘리나 케이건 대법관도 지난 주 프린스턴 대학 강연에서 이점을 강조했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에서 시작되어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으로 이어지면서 지난 40년 동안 중도에 섰던 대법관들이 있어 대법원은 이편도, 저편도 아닌 불편부당한 중립적 공정한 기관으로 보일 수 있었다…사람들이 우리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공정함을 존중하기 때문이다…정치 환경이 극도로 분열된 시기에 대법관 각자는 무엇이 대법원에 정통성을 주는가에 대해 숙고해야할 의무가 있다.”

2006년 오코너 후임으로 지명된 ‘확실한 보수’ 새뮤얼 얼리토의 입성이 대법원 보수 회귀의 첫 전환점이었다면, 이번 케네디 후임으로 지명된 캐버노의 취임은 대법원 보수 정착의 전환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캐버노의 입성으로 “연방대법원의 보수 우위를 정착시키려는 공화당의 50년 과제가 그 정점을 찍었다”고 월스트릿저널은 평가했다. 1996년 이후 지명된 18명 대법관 중 14명을 공화당 대통령들이 지명했는데도 주요 이슈에서 보수 판결을 얻어내는데 수없이 실패해온 공화당은 “이번에야말로…”를 다짐하며 한껏 기대를 높이고 있다.

그들이 고대해온 ‘획기적 변화’는 실제로 어느 정도 가능한가. 여러 전문가들의 진단을 종합한 월스트릿저널은 보수화는 확실하겠지만 “1937년 이후 뉴딜의 헌법적 근거를 확보한 대법원이나 1954년 인종통합교육 판결로 시작된 민권혁명과 비슷한 정도의 변화를 이룰 수 있을지는 명확하지 않다“라고 전망했다.


정치판도 변화와 로버츠의 스윙 보트 역할 등 여러 변수가 작용할 수 있어서다. 공화당이 계속 백악관과 의회를 장악한다면 대법원의 보수 판결도 확대되겠지만 향후 몇 년 내에 민주당이 통치권을 탈환한다면 대법원도 다수의 방향에 어디까지 역행할 수 있을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2012년 진보에 합류해 오바마케어의 합헌 판결을 이끌어내며 ‘스윙 보트’의 역량을 과시한 바 있는 로버츠도 새롭게 강화된 보수 파워를 전면행사하기 보다는 필요할 때 브레이크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캐버노 자신이 인준전쟁에서의 대미지 컨트롤을 위해 당파적 이념주의자를 지양하며, 불편부당한 법관의 자세를 보여줄 수도 있다. 8일 취임선서 후 그 자신도 “난 한 정당이나, 한 이해집단이 아닌, 한 국가에 서브하도록 지명 받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캐버노의 대법원’은 ‘케네디의 대법원’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대법원의 새로운 다수가 사회적 보수주의자들에게 공감을 보이면서 낙태권과 동성애자, 이민자와 소수민 보호가 흔들리고, 기업과 고용주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면서 근로자와 소비자와 환경보호자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다. 격렬한 투쟁도, 극단적 저항도, 보수 판결의 증가를 막지 못할 것이다.

아직은 ‘로버츠의 스윙 보트’라는 희망의 여지라도 남아 있다. 또 다른 캐버노의 입성으로 희망의 여지마저 없어질 절대 보수 대법원이 두렵다면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투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투표는 낙태와 동성애와 총기규제, 그리고 드리머들이 발붙일 수 없는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어느 쪽이 더 적극적으로 투표하는가에 미국의 내일이 달려 있다.

<박 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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