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 공포’

2018-09-13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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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공포’가 1주일을 넘기며 워싱턴을 사로잡고 있다. 트럼프에 의한, 트럼프에 대한, 트럼프의 공포다.

공포의 뿌리는 트럼프다. 충동적인 대통령의 무모하고 무지한 통치의 민낯이 그의 참모들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미 국민들의 두려움이 가중되고, 내부의 잇단 폭로에 트럼프 자신도 배신 공포에 시달릴 것이다. 공화당은 트럼프 지지도 하락이 11월 선거 참패로 이어질까 비상이 걸렸고, 민주당은 부상하는 트럼프 탄핵론이 유리한 판세에 역풍이 될까 경계상태에 돌입했다.

“공포는 리얼 파워”라고 단언한 트럼프만이 정치에서 공포의 힘을 실감한 건 물론 아니다. 1933년 경제대공황의 와중에서 취임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우리가 두려워해야할 것은 두려움 자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두 대통령의 대처법은 정 반대다. 프랭클린은 노변정담을 통해 공포에 사로잡힌 국민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며 희망의 정치를 펴나갔고, 트럼프는 ‘이민’을 희생양 삼아 더 강한 공포분위기 조성으로 핵심표밭 다지기에 열중했다.


트럼프 집권 20개월이 혼돈의 연속이긴 했지만 특히 지난 몇 주는 폭풍이 몰아치듯 잇단 악재가 속출했다. 로버트 뮬러 특검 수사에서 하루 동안 전 선대본부장 폴 매너포트가 사기혐의로 유죄평결을 받고 전 개인변호사 마이클 코언이 사기혐의 유죄를 인정하고 트럼프를 끌고 들어간 플리바게닝을 시도하는 등 최측근 2명이 ‘사기꾼’임이 만천하에 입증되면서 ‘잔인한 8월’이 끝나는 듯하더니 8월말 타계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추도행사가 9월 초까지 거국적으로 이어지며 ‘편협하고 분열적인’ 트럼프에 대한 무언의 질책으로 조명되었다.

그리고, 지난주 두 개의 폭탄이 잇달아 터졌다. 워터게이트 특종보도로 리처드 닉슨을 사임케 했던 워싱턴포스트의 저명 언론인 밥 우드워드의 저서 ‘공포 : 백악관 안의 트럼프’ 출간소식과 함께 백악관의 난맥상을 파헤친 내용이 공개되었다. 최고위 참모들이 대통령을 ‘5~6학년 수준 이해력’의 ‘정신 나간 천치’로 부르는 ‘크레이지타운’ 대통령 집무실에 대한 폭로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하루 뒤 또 하나 폭탄이 터졌다.

뉴욕타임스가 트럼프 행정부의 고위관리라고만 밝힌 익명의 칼럼을 실은 것이다. 익명의 기고자는 현 행정부엔 ‘즉흥적이고 적대적이며 옹졸하고 비효율적인 대통령’에 의해 초래될 위험한 결정을 막아 ‘미국을 더욱 안전하고 번영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조용한 저항세력’이 존재하며, 자신이 포함된 이 세력이 ‘트럼프가 갈 짓자 행보를 보일지라도’ 바르게 잡으려 노력하는 ‘투 트랙 대통령직’을 운영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우드워드의 책과 익명의 기고가 폭로한 ‘혼돈의 백악관’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내용 자체가 새로운 건 아니다. 트럼프의 근본문제가 도덕관념 결여라는 것도, 그가 국제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암투 치열한 백악관의 기능마비 상태도, 고위 관리들이 그를 ‘바보 멍청이’로 뒷담화 한다는 것도 수없이 보도되었다.

익명의 칼럼과 우드워드의 책은 그 혼돈상태가 구체적으로 폭로되면서 이런 보도를 반신반의했던 상당수 사람들에게 사실로 믿게 만들어주고 있다.

책과 칼럼에 대해 반응은 엇갈린다. 트럼프가 취임 이후 반복해온 정치투쟁들의 또 하나 시작이다. ‘두 개의 가설이 대립하는 신뢰도 대결’로도 표현된다. 트럼프 대 제임스 코미 전 FBI국장, 트럼프 대 뮬러 특검, 트럼프 대 포르노스타 스토미 대니얼스가 상반된 주장으로 맞서왔다. 트럼프의 자질부족과 러시아 공모를 의심하는 반 트럼프 쪽 가설과 기성체제에 도전하는 강력한 아웃사이더를 지지하는 친 트럼프 쪽 가설이 이번엔 트럼프 대 우드워드의 신뢰도 경쟁 양상을 띠고 있다.(이 경쟁에서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은 트럼프 자신도 시인할 것이다!)

직격탄을 맞은 백악관과 행정부는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더 한층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다. 혐의자의 긴 명단도 여기저기서 나오고 명단에 오른 부통령은 거짓말탐지기 테스트를 자청하고 나섰다. 격노한 트럼프는 ‘반역’의 익명 기고자 색출을 법무부에 촉구하면서 ‘범인’ 처벌과 우드워드 대상 소송을 천명하지만 법적처벌도, 명예훼손 소송도 ‘난망’ 상태다.


우드워드가 책에 인용한 인사들이 다투어 반박에 나섰으나 아직은 ‘트럼프 달래기’ 수준에 머물고 있고 우드워드는 “1000% 정확하다”고 자신한다. 익명의 기고가 범죄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법무부 수사도 불가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현 시점에서 이번 사태의 파장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이번 주 발표된 일련의 여론조사들을 통해 ‘워싱턴의 서커스’로 인해 경기호황 중 현직대통령의 인기 하락이라는 전례 없는 현상과 공화당의 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을 뿐이다.

반전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여전히 공화당의 80%는 트럼프를 지지하며, ‘폭로 폭풍’이 계속되리란 보장도 없고, 트럼프가 허리케인 플로렌스에 잘 대처해 지지도가 회복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으로 트럼프는 더 이상 참모들을 신뢰하기 힘들 것이다. 참모들도 더 이상 서로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배신에 대한 공포’가 백악관의 일상을 지배할 수도 있다.

이 막장드라마가 미국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가 - 국민들의 공포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왜 이 책을 썼느냐는 질문에 우드워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다음은 정치제도의 몫이다. 워터게이트 당시에도 사실이 드러난 후 닉슨을 사임케 한 것은 연방의회였다”

당시와 달리 이미 ‘트럼프의 당’이 되어버린 현 공화당 주도 의회에 대통령 견제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희망에 가깝다. 그렇다고 우리가 ‘트럼프 공포’에 속수무책이란 말은 아니다. ‘투표’라는 가장 확실한 무기가 남아있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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