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15일. 세계 제 2차대전의 종전으로 대한민국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해방의 기쁨도 잠시, 남과 북이 구소련과 미국의 세력다툼으로 6.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한반도는 초토화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나의 가족도 참혹한 고난을 겪었다.
아버지의 유일한 자산인 화물차 2대가 군용차로 징발되었고 차를 찾을 욕심으로 아버지는 종군해 사선을 몇 번 넘은 끝에 차를 돌려받고 의가사 제대를 했다. 아버지의 귀환으로 우리 가족은 행복했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의 셋째 동생인 4살배기 원형이가 홍역에 걸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고 고열로 인해 열꽃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 당시에는 의사들도 피난을 가버리고 없어서 치료약을 구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약을 구해 보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부모님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찬물을 수건에 적셔서 이마에 얹어 놓거나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는 정도였었다. 거의 열흘 정도가 지난 후 나의 동생 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아버지는 동생이 쓰던 비단 이불에 죽은 동생을 고이 싸서 집에서 가까운 공동묘지의 빈터에 땅을 파고 동생을 뉘었다. 그 순간 동생의 조그만 손이 이불 속에서 삐쭉 나왔다.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지기가 서러워서였을까. 아버지는 동생의 손을 잡고 대성통곡을 하셨다. 아버지는 저녁 어두움이 내릴 때까지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넋을 놓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을 말하면,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집을 떠난 아들이 세속에서 방탕한 생활을 보내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모든 것을 잃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성경 속의 아버지의 손을 가장 잘 표현한 그림이 있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의 성화 작품인 ‘ 돌아온 탕자 ’이다. 일명 ‘아버지의 손’이라고도 한다. 탕자의 아버지가 아버지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회한의 오열을 하는 축 처진 아들의 어깨를 따뜻한 손으로 감싸며 용서하는 아버지의 손을 그린 그림이다.
8.15 해방 이후 격동기의 근세사에서 남북통일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며 가슴을 뭉클하게 감동을 준 아버지의 손이 있다. 김구 선생의 ‘손’이다.
광복 후 김구는 이승만 등과 남북이 갈라지는 미소 신탁통치반대 운동을 추진하고, 1948년 1월에 평양에서 남북통일 협상에 참여했다. 또한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임시정부 주최로 경교장에서 남로당(조선공산당)을 비롯한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을 초대하여 남북분단을 야기 시키는 반탁운동에 총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김구는 6.23 반탁 데모에 참가한 청년들과 학생들에게 독립운동 때 일본 순사를 한 주먹으로 때려눕힌 두툼하고 큰 손으로 청년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며 친필로 쓴, 조선 세조 때의 명장 남이 장군의 시 한 폭을 청년들에게 선사하며 격려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니,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일컬어 주리오.”
김구 선생은 시대가 그의 뜻을 받들어 주지 못해 남북통일을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70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 남북한을 둘러싼 강대국인 미중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진전되고, 한, 미, 북의 실질적인 종전 및 평화 선언이 급격하게 가시화 되고 있다. 8.15 광복절을 맞아 멀지않은 장래에 김 구 선생이 이루지 못했던 남북통일을 성사시키고, 서로 손을 마주잡고 번영의 공동체를 향해 치달리는 통일의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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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김 그린벨트,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