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일상 (日常) 밖에서

2018-05-25 (금) 최동선/커네티컷 전 한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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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외출했다가 집으로 가던 중에 도로가 막혀 몇 시간 째 차 안에 갇혀 있다고 했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와 돌풍으로 골목마다 큰 나무들이 뿌리 채 뽑히거나 쓰러져 있어 우회도로를 찾느라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있는 곳에도 잠깐 동안 폭우가 내렸지만 이쪽의 상황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으므로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응급 차량의 다급한 사이렌 소리로 아내가 있는 곳의 긴박함을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 후로도 아내는 집으로 가는 길목 어딘가의 차 안에서 그 쪽 상황을 전해주며 퇴근길에 들어 선 나에게 열심히 통신원 노릇을 해 주었다.

통제된 도로와 우회도로에 대한 아내의 말을 기억하며 낯선 길로 돌아 가던 중에 우리 동네는 이미 정전이 되었으며 집으로 가는 길이 모두 막혀 있으니 옆 동네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속보처럼 전해졌다. 옆 동네에도 폭우가 지나간 듯 보였으나 그 곳은 비가 그친 어느 날의 저녘 풍경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미 저녁 시간을 비켜선 식당 안은 오히려 한적했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종업원들을 보며 덩달아 잠시 긴장을 내려 놓아도 좋은 그런 밤 이었다. 아내와 함께 식당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느긋하게 머물다 집으로 향했다.


몇 시간 사이에 도로 일부가 긴급히 복구되고 있었으나 불빛이 사라진 마을은 이미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그제서야 아직 확인 하지 못한 우리집이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이런 상황에 별 일이 없는것은 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희미한 랜턴에 의지한 채 익숙치 않은 어둠에 적응하느라 애쓰며 그 밤을 그렇게 보냈다.
아침 출근길에 본 주변 풍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해 보였다. 집집마다 부러진 나무 가지가 마당 가득 널브러져 있었고 전기줄에 비스듬히 기댄 채 위태롭게 버티는 아름드리 나무를 보며 복구 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릴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큰 사고 없이 지나간 지난 밤에 감사하며 조급해 하지 않기로 하고 한다.

아내는 촛불을 켜 식탁 위를 밝히고 창고 깊숙한 곳에서 휴대 가스 버너를 찾아 내어 식탁 한가운데 놓았다. 식은 밥에 잘게 썬 고기와 김치를 넣어 볶은 밥으로 저녁을 때우고 나니 다시 어둠과 친구가 되었다. TV 도 없고 인터넷도 되지 않는 공간은 바깥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했고, 그렇게 오롯이 고립된 밤은 무척 길게 느껴졌다. 건성으로 펼친 책 너머로 벽난로 위에 걸린 그림 속 여인이 촛불을 따라 흔들렸다. 백열등 아래서 경험하지 못한 편안함을 느끼며 주제없는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고, 또 하루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하루, 이틀에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정전은 예상보다 빨리 해제 되었다. 거리는 빠르게 복구 되어 가고 길가의 크고 작은 상가에도 다시 불이 켜졌다. 사람들은 다시 던킨 커피 앞에 줄을 서고, 노인은 복권을 파는 가게 앞에 차를 세운다. 폭우가 쏟아졌던 밤, 길을 막고 있던 위태로운 나무, 며칠간의 암흑의 시간 등은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촛불 아래 아름답던 시간은, 아니 그 불편했던 시간을 아름답다고 애써 포장했던 기억도 이미 사라졌다. 따뜻한 물에 편안하게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것과 불편한 식생활이 말끔히 해소 되었다는 것에 여유로움마저 느낀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고난의 시간 또한 그렇게 갑자기 왔다가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일상을 통제하던 숨막히는 시공간에서 머물때 못느꼈던 일상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최동선/커네티컷 전 한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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