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04)제34대 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⑥

2018-04-27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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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wn vs. Board of Education” 이란 대법원 판결의 주인공인 Linda Brown이 지난달 하순에 76세로 사망하였다. 이 판결은 표면상 보이는것 처럼 한 흑인학생이 백인학교에 등교할수 있다는 권리를 인정한 단순한 판결이 아니고 미국의 인권옹호 발전사상 아주 중대한 이정표가 되는 역사적 판결이었다.

Topeka시에는 백인소학교가 18개, 흑인 소학교가 4개가 있었는데 Linda가 살고있던곳 근처에 백인학교가 있었고 흑인학교는 2마일이 넘는곳에 있었다. Linda가 아홉살로 소학교 3학년때 근처의 백인학교로 전학 하려고 하다가 거부를 당하자 Linda 의 아버지 Oliver Brown이 1951년에 시교육 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하였고 미국 전국민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3년동안 NAACP의 후원을 받아 대법원까지 올라갔던 사건이었었다. 이 판결로 미국의 대법원은 “학교의 분리,” “불평등,” “인종차별” 등이 “위헌” 이라는 분명한 의사표시를 하였던 것이다.

대법원의 이 학교통합명령은 엄밀한 의미에서 7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완전하게 집행되지는 않고있다. 공립학교간의 인종균형을 마추기 위해서 뻐스통학등 인위적인 노력이 있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북부주들에서도 아직까지 학교통합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를들어서 New York 시에서도 오래전에 공화당 소속의 Rudolph Giuliani 시장을 하던 1990년대말부터 charter school 이라는 명분으로 공립학교들을 사실상 인종적으로 분리되도록 하는 일이 일부 공화당계 사람들에 의해서 지금까지도 추진되어 오고 있다. 1950년대에 남부주들의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발이 어떠했을가를 짐작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법원은 판결만 할뿐 판결을 집팽할 권환과 의무는 연방, 주, 시 행정부가 가지고 있는 까닭에 법원의 판결이 국민들의 정서나 집권세력의 생각에 맞지않을 경우에는 판결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수가 있다.

미국의 “원죄”라고도 할수 있는 참혹한 원주민 학대에 대해서도 미국원주민 (American Indian 이 아니라!) 의 영토권과 박탈된 모든 권리를 원상회복 하라는 미국 대법원의 오래된 판결은 사문화되어서 있으나 마나한 종이조각이 되어 버렸다. 지난 50여년동안에 미국원주민에 대한 미국의 역사는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이라고 고백한 대통령후보는 Bernie Sanders 상원의원 한사람뿐이다.

남부의 여러주들은 대법원의 공립학교 통합에 대한 판결을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집행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1955년에 대법원은 공립학교통합판결이 신속하게 집행되어야 할것임을 명령하였다. Washington, D.C. 와 여러 주들에서는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남부주들은 복지부동이었다. 이런 와중에 1956년 3월에 남부주들의 상하의원 100 명 이상이 “남부선언서” (The Southern Manifesto) 에 서명하고 대법원의 통합명령 판결을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써서 번복시키겠다고 하였다. 이 선언서에 서명하지 않은 남부 상원의원들은 Texas 의 Lyndon B. Johnson 상원원내총무, Tennessee 주 Estes Kefauver, Albert Gore (Sr.) 상원의원등 세명 뿐이었다. 이제 남부주들은 본격적으로 통합명령집행을 거부하였었다.

대법원의 공립학교통합명령을 기피하기 위하여 휴교를 한 Little Rock 사건
첫번째의 정면 거부사건이 1954년 가을에 일어났다. Arkansas 주 Little Rock 시 교육위원회가 가을학기 부터 공립고등학교를 통합하려하자 Orval Faubus 주지사는 Little Rock 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 선언하고 주 방위군 (National Guard)을 보내서 흑인학생들이 등교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연방지방판사는 주 방위군이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9월 23일에 흑인학생들이 다시 등교 하려하자 이번에는 백인폭력배들이 흑인학생들을 등교하지 못하게 하였다. Ike 는 대통령이 법원의 판결에 가부간 언급을 하는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남부의 주들이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집행할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 한다고 어정쩡한 얘기를 해왔었었다. 그 사이에 사태는 폭력 사건으로 까지 발전하였고 이제는 대통령이 더 이상 발뺌을 할수없는 지경이된 것이었다.

드디어 Ike 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Arkansas 주 방위군을 연방군으로 편입시켜서 주지사가 주 방위군을 더 이상 동원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Ike 는 곧 이어 연방공수부대 천명을 파병시켜 흑인학생들을 등교하게하고 공수부대가 가을내내 Little Rock 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Faubus 주지사는 학교에 즉각적으로 휴교명령을 내리고 통합을 방지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일년내내 휴교시켜 버렸다.


세상에 1957년에 인종차별을 위해서 학교를 일년 내내 휴교하는 “후진국”이 몇군데나 있었을 것인지 궁금한 일이었다. 더욱 놀라울일은 같은해에 Virginia 주도 흑백통합방지를 위해서 몇군데의 학교들을 휴교 시켰었다는 것이다. 학교통합문제는 그후 계속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되어 왔으며 지금까지도 시원하게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드디어 1950년대의 미국은 본격적인 민권 (인권) 운동이 시작될수있는 환경으로 무르 익어가고 있었다. 흑인들의 자기 각성이 절실하였었고 흑인지도자를 갈망하게 되어있었다. 이무렵에 등장하는 흑인 지도자들중에 Martin Luther King, Jr. 라는 침례교목사는 혜성 처럼 나타나 흑인들을 일깨우고 양식있는 백인들을 감동시켰으며 미국과 전세계에 큰 발자취를 남기었다. 그는 1929년에 Atlanta 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를 닮아 설득력있는 말을 분명하게 잘하였으며 많은 청중을 한손에 휘어잡는 대웅변가 이었다.

그가 1963년 8월 서른네살때에 Washington 의 Lincoln Memorial 앞에 민권운동차 모인 20만명 이상의 청중들 앞에서 인종차별이 완전히 없어진 미국을 그리며 한 “I have a dream” 이란 연설은 백번을 되들어도 들을적마다 새로운것을 깨닫게 하며 저절로 눈물이 글썽거리게 만드는 뭉클한 감동을 준다. 남앞에 내어놓을 것이라고는 가득찬 나이밖에 별로 없는 필자같은 사람들은 “30대 초반” 이라면 “손자또래의 아이” 라고 교만을 부리기가 일수인데 “어린” King 목사의 그 연설은 필자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노망”에 들어가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교훈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King 목사는 Atlanta 에 있는 흑인명문학교 Morehouse 대학을 나온후 Boston University 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5년에는 인종차별이 아주 심한 Alabama 주의 Montgomery 시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침례교목사로 일하고 있었다.

1955년 12월 1일에 Mrs. Rosa Parks 라는 흑인봉제공은 Montgomery 에서 지친몸으로 퇴근차 뻐스에 올라 흑인에게 배정된 후반부의 맨앞줄 의자에 앉았다. 조금후 백인석이 만원이 되자 Rosa 는 백인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뒷쪽의 흑인좌석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경찰이 와서 법률위반이라고 Rosa 를 체포하여 갔다. 도대체 1955년에도 시내뻐스에 흑백지정좌석이 구분되어있던것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흑인좌석에 앉았다가도 백인이 필요하다면 자리를 내어 주어야만 한다는 기가 막히는 법률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유색”이민자 (‘The colored’ 는 흑인만을 의미하는것은 아님) 가 살다보면 아는새 모르는새에 인종차별을 받는 경우들이 있지만 그래도 아마 Rosa 가 받았던것 같은 수모는 우리동포들 대부분은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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