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러시아의 샌프란시스코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인의 숨결이

2018-04-20 (금) 권태진/변호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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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베리아 횡단열차 기행①

러시아의 샌프란시스코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인의 숨결이

지도김정일이 들렸던 식당

러시아의 샌프란시스코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인의 숨결이

2017년 8월1일부터 23일간에 걸쳐 러시아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브스크 -울란우데 -이르쿠츠크 -노보시벌스크-에카테린버그-니즈니 노브고로도-모스코바-세인트 피터스버그 까지 총9개 중요도시를 시베리아횡단열차로 찾아갔다. 총 9,521킬로 5,916마일로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왕복에 해당되는 거리며 열차주행시간 총 150시간이다. 시베리아의 중요한 6개 도시와 바이칼호, 우랄산맥, 볼가강도 일정에 포함되어있다.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들의 연해주 망명이주 크게 늘어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항일투재 등 역사 한눈에
중일전쟁 때 고려인 추방시킨 라즈돌노예 역은 ‘통곡의 역’

20대 청년기 리더스다이제스트에서 게재된 시베리아의 봄에 관한 글을 읽은 일이 있다. 반세기가 지나서 갑자기 시베리아 횡단열차여행을 실행하게 되었다. 여행비를 줄이고 내가 선택한 곳만 가기 위해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안내자 없이 혼자 하는 여행을 택했다. 온라인으로 방문지선정, 열차표구입, 호텔예약 등 준비를 했다.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나는 통역대신으로 사용할 전화기 사용법 등 사전 준비를 하면서 출발 몇 주 남기고 러시아어 알파벳과 발음공부도 했다.


8월 1일
시베리아횡단열차 첫 출발지 블라디보스토크 (Vladivostok)
7월27일 일본항공으로 뉴욕을 출발 일본에서 4일간을 보냈다. 일본을 알기위한 목적이었다. 8월 1일 S7 일본항공으로 오후 3시 40분 동경을 출발 두 시간 반 비행으로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현직시간으로 저녁 7시 10분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특별한 관심의 지역이라 3일을 체재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한때 고조선인 발해의 땅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이 농업이주로 왔으며 일제강점시기 망명과 독립운동의 땅으로 조선인들의 얼이 심어있는 있는 땅이기 때문이다.

공항에 도착하여 유심(sim) 카드를 구입 전화기에 넣었다. 유심카드를 가라 넣지 않으면 러시아에서는 전화기를 사용할 수 없다. 택시로 40분정도 후 도착한 Azimut 호텔은 태평양을 바로 보는 시내 중심부 언덕 위에 위치한 호텔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극동의 군사기지이며 프리모르스키주 행정중심지이다.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시발점이며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의 문호이다.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60만3천명이다. 중국 북한 러시아 세 나라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러시아의 샌프란시스코”란 별명도 가진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1860년까지는 중국의 영토였으며 고대조선 발해국의 영토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는 바다에 영접해 있다고 하여 한자표기로 이 지역을 연해주라 불리어 왔다.

연해주 한인이주는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첫째는 조선 내의 대기근 등과 같은 경제적 이유였고 둘째는 경술국치와 같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최초의 이주는 1860~1884년까지로 조선후기인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연해주로 이주하면서 고려인의 이주 역사가 시작되었다.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전후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애국지사들의 망명이주가 크게 늘어났으며 1910년 이후 일제에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대거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러시아에 터전을 잡고 있었던 모든 조선인들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서 그해?9월 9일부터 10월말까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스탈린정권은 한인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핑계로 20만 명에 이르는 고려인들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카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강제 이주를 시켰다.

8월 2일
조선인 최초 농업이주 우수리스크 (Ussuriysk)
이날은 고려인의 역사 현장을 보기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97킬로 (61마일) 지점에 있는 우수리스크 지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우수리스크는 연해주에서는 두 번째 큰 곳으로 인구 약16만의 도시다.

호텔에서 아침 10시30분 호텔에서 부른 택시로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인접지역의 마을 라즈돌노예 (Razdolnoye)에 사역하는 전영수 선교사를 만나 안내를 받기로 했다. 전선교사의 사역지에 도착한 것은 정오가 지나 전목사의 차로 우수리스크에 있는 한 식당으로 향했다. 러시아인이 운영하는 일식 중국식 혼합 식당에는 전선교사 사모 정현미 선교사, 러시아 시베리아의 도시 울란우데 시에서 선교하는 황찬일 선교사 부부, 중국에서 북한선교를 하는 익명의 선교사부부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 후 전선교사의 안내로 황선교사 부부와 함께 우수리스크에 있는 고려인 문화센터를 방문했다. 넓은 부지에 단층으로 된 현대식 건물이다. 1800년대 후반 고려인의 생활, 고려인의 이주와 항일투쟁 역사 등 연해주 고려인의 삶과 역사를 보여주는 물품과 사진 동영상 등의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한인들의 이주 역사와 그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좋은 공간으로 한국에서 오는 단체관광객들의 중요한 방문지가 되고 있다.

역사관에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꼽히던 최재형의 옛집으로 향했다. 우수리스크시에 있는 이 집은 수리를 하고 있어 내부는 볼 수 없었지만 외부로 보면 평범한 작은 집이다. 최재형이 말년에 살던 이 집은 기념관으로 꾸며져 방문객을 맞을 예정이다. 함경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최재형은 1866년?아버지 손에 이끌려 연해주로 와 자랐으며 폭 넓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러시아 군 장교로 근무하기도 한 최재형은 군수업으로 많은 부를 쌓았다.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항일투쟁을 위해 사용하였다. 말년에 경제적 여건이 여의치 않아 초라한 집에서 말년을 보내다가?1920년 연해주에 침입한?일본군에 의해?사살되었다. 당시 최재형의 나이 63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1962년?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

최재형의 집을 떠나 부근에 있는 수이푼 강변에 세워진 이상설 기념비로 안내되었다. 이상설은 조선(대한제국)의 신하이자?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다.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이후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이바지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건국훈장?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는 유언으로 시체를 화장하여?강에 뿌리라는 유언에 따라 그의 친구들이 수이폰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유해를 화장하여 강에 뿌렸다. 이상설의 비가 서있는 수이폰 강은 강도 좁고 흐르는 물도 얼마 되지 않았다.

고려인추방 ‘통곡의 역’ 라즈돌노예 (Razdolnoye)
라즈돌노예 역은 연해주 일대의 고려인들을 집결시켜 태운 여러 기차역 가운데서도 1937년 9월 9일 550명이 중앙아시아로 처음 출발한 ‘통곡의 역’이다. 목적지도 모르고 오랫동안 이루어 놓았던 터전을 버린 채 빈손으로 쫓기듯 올라탄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은 굶주림과 공포뿐이었다. 화물차에 실려 가는 도중 10,000명이상이 굶주림과 병으로 사망했으며 시체는 열차 밖으로 버려졌다고 한다.

전영수선교사는 자동차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열차를 타겠다고 했다. 이 열차는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아니며 지방으로 다니는 열차다. 전선교사집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역으로 와 작별을 하고 10시 20분 출발 기차에 올랐다. 1950년대 한국열차와 다를 바 없이 나무의자가 놓여있다. 그러나 기관차의 화력은 석탄이 아니고 전기다. 승객들이 얼마 없어 빈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80년 전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조선족들이 탄 열차일 수도 있다고 상상해 보았다. 열차는 여러 곳에 정차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가 지난 정오 가까이었다.<계속>

<권태진/변호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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