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의 당’ 떠나는 폴 라이언

2018-04-19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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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의 승리가 예상되었던 선거 당일 밤, 폴 라이언 연방 하원의장은 특별한 연설문을 준비했다. 민주당 승리에 대한 실망, 도널드 트럼프의 편견 정치 강력 비판과 함께 트럼프의 패배를 계기 삼아 공화당이 포용적인 ‘빅텐트 정당’으로 회귀하자는 희망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당선되었고 라이언의 가시밭길이 시작되었다.

라이언과 트럼프의 관계는 출발부터 다난했다. 부통령 후보를 역임한 젊은 하원의장으로 전통적 공화당의 선명한 보수 신념과 실용적 소통 능력, ‘적자 없는 미국’의 청사진을 제시한 지성까지 갖추어 ‘공화당의 미래’로 불리던 라이언에게, 흠집 많은 부동산 갑부 트럼프는 출마 선언 때부터 한마디로 수준 미달의 후보였다.


본선에 들어선 후에도 자당 후보 트럼프를 지지해야 하는 것이 라이언에겐 계속 스트레스였다. 급기야 선거를 한 달 앞둔 10월 초, 트럼프의 성추행 녹음파일이 공개된 후 라이언은 “더 이상 트럼프를 방어하지 않고 하원 다수당 유지에 주력하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공화당 하원의장이 공화당 대선 후보를 버린 것이다.

이민, 무역, 재정 등 주요 이슈의 정책방향에서 정치철학까지 모든 게 완전히 다른 트럼프의 당선 후 라이언은 정면충돌을 피했다. 새 대통령의 인종차별적, 여성혐오적 언행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는 않았으나 형식적인 반대 이상으로 맞설 의지를 보이지도 않았다.

스스로도 당선에 놀랐을 만큼 준비 안 된 대통령과 전략적 동행을 하며 보수 어젠다를 입법화시키겠다고 계산한 실용적 접근이었다는 우호적 분석도 있긴 하다. 그러나 트럼프는 하원의장의 청사진을 고분고분 따를 의사가 없었다고 CNN은 지적한다.

결국 자신의 원칙을 저버리고 트럼프의 선동정책을 묵인한 라이언은 “트럼프에게 영혼을 팔았다”라는 극단적 악평까지 감수해야 했다.

라이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무절제한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하원의장 취임 첫날부터 통제하기 힘들었던 공화당 내 티파티 극우 강경파의 반란은 트럼프 취임 이후 더욱 악화되었다. 승리를 위해선 당론은 물론이고, 의회정치의 전통적 룰도 무시하는 트럼프와 티파티가 백악관과 의사당 양쪽에서 ‘이중 위협’을 가하며 라이언을 가로 막았다.

지난 주 라이언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안팎으로 막다른 골목에 갇힌 듯한 그 개인의 정치환경에 더해 공화당 패배를 전조하는 민주당 물결이 전국을 휩쓰는 상황에서 이미 몇 달 전부터 그의 퇴장 설이 나돌았으니 은퇴 자체가 깜짝 놀랄 뉴스는 아니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갖는”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워싱턴을 떠난다는 은퇴이유도 진심일 것이다. 2015년 골치 아파 아무도 원치 않은 하원의장 직을 마지못해 떠맡으면서 내건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도 주말엔 아이들 보러 반드시 고향 집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공화당 차기 대선주자 1순위로 꼽혔던 라이언의 은퇴 이유가 그 때문 만이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공영방송 NPR도 측근의 말을 인용해 “라이언은 진저리를 쳤다”고 전한다. 트럼프주의자들과 타협은 실패했고 선거패배의 먹구름은 갈수록 짙어지는 상황에서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라이언이 떠난 공화당의 앞날은 두 가지 측면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나는 트럼프의 공화당 정복이다. 지난 15개월 동안 포퓰리스트 트럼프와 공화당의 기수 라이언의 통치관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확실해지면서 의회 안팎 공화당 일반 당원들의 지지는 트럼프 쪽으로 기울어 왔다. 트럼피즘 부상이후 약화되기 시작한 전통 보수주의가 라이언의 퇴장과 함께 더욱 위축될 것이라는 뜻이다.

“트럼프는 이제 공화당의 동의어가 되었다”고 지적한 USA 투데이는 전통적 보수의 리더가 필요한 시기에 라이언이 “자신의 당을 버렸다”고 질책했다. 그러나 요즘 공화당의 분위기는 당이 먼저 라이언을 떠났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더 급한 발등의 불은 중간선거다. 공화당의 하원 주도권 상실을 겨냥한 11월의 역풍은 이미 불기 시작했으니 라이언의 은퇴가 큰 영향을 주진 않을 것이라는 진단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의 퇴장이 민주당 물결을 한층 부추기면서 공화당의 사기저하를 가져올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공화당 최고의 선거모금가로 인정받는 라이언은 선거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글쎄, 레임덕의 모금 호소가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미지수다.

라이언에 이어 엊그제 펜실베이니아의 찰리 덴트까지 공화당 하원의원의 불출마 선언은 43명으로 늘어났다. 이중 23개석만 빼앗으면 하원 주도권은 민주당으로 넘어간다. 중간선거가 꼭 200일 남은 19일 현재, 민주당의 승리확률은 공화당보다 5.5포인트 앞서 있다.

그런데, 48세 젊은 하원의장은 정치와 영원히 결별하려는 것일까. 트럼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정치커리어를 재정비하면서 트럼프 시대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려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10년을 기다린 후 2028년 대선에 출마한다 해도 58세의 ‘적령기’ 후보가 될 것이다.

이번 주 초 정계복귀 가능성을 묻는 CNBC의 질문에 라이언 자신은 “결코(never)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는 법이라지요”라고 대답했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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