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취임후 Ike의 정책은 점차적으로 초기보다 온건하고 중도적으로 되어갔다. 1954년과 1956년에Social Security 혜택이 증액되었으며 천만명의 국민들이 Social Security System에 새로이 가입할수 있도록 확대 되었었다. 1955년에는 대통령과 국회가 합의하여 시간당 최저임금이 75전에서 1불로 인상되도록 하였다. 도시의 빈민굴들을 허물고 공립서민주택들이 건축되었다. Ike는 개인건강보험에 국가보조를 해줄것을 요청하였으나 국회는 동의하지 않았었다. 그대신 의료연구비와 병원을 위한 예산증액이 되었었다.
1954년에는 Truman이 원래 제안했던대로 보건교육복지부 (H.E.W., 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 를 신설하였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역점을 두어왔던 사업들에 공화당도 정부의 역활을 증대하겠다는 의도를 표시한 것이었다.
소위 McCarthysm으로 무절제하게 “미국정부내의 공산주의자 소탕”을 외치며 미국내 정국을 불안하게 만들어왔던 공화당의 Joseph McCarthy 상원의원은 상원의 정부행정 위원장이 되어서 “정부안의 공산분자들을 쫓아내자” 라고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지난 20년간 민주당은 공산분자들이 정부에 잠입하도록 하는 국가반역을 해왔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McCarthy 는 자기가 소속된 공화당도 비슷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Ike와 Dulles 는 국회의 협조가 필요하였음으로 McCarthy의 과도한 주장에 정면으로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Dulles는 마치 McCarthy의 비위를 맞추기라도 하려는듯이 그의 추종자라고 알려진 사람을 국무성의 안보책임자로 임명하였다. Ike도 1953년에 공무원의 활동중 사찰을 받을수 있게되는 영역을 넓히는 대통령령을 발표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공무원에게 하찮은 일이거나 근거가 없는혐의가 제기되더라도 그사람은 “무죄가 입증될때까지 정직”되도록 하였다. 이 명령은 “모든 국민은 유죄가 판명될때까지는 원칙적으로 무죄이다” 라고 하는 미국의 법치주의 전통에 어긋나는 것으로써 공무원들의 사기를 엄청나게 떨어지게 만들었었으나 이 명령으로 사실상 파면된 공무원수는 많지 않았었다고 한다.
McCarthy는 더욱 기승을 부려서 해외에 있는 미국의 도서관들에서 그가 싫어하는 모든 책들을 공산주의 책자라고 전부 제거하도록 하였다. 1954년에는 육군장관이 New Jersey에 있는 Fort Monmouth기지내에서 간첩활동이 있는 것을 알고도 덮어놓고 있다고 했고 또 어떤 육군준장이 공산주의자들을 숨겨주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상원 공개 진상조사로 McCarthy의원의 시대도 막내려
인내심이 한계점에 도달한 백악관은 육군이 McCarthy의원이 그의 직원이 징병된후 특혜를 청탁했다고 발표하자 육군을 지지하고 나섰다.
드디어 McCarthy 의원의 언동에 대한 상원의 진상조사위원회가 국민들 2천만명이 보게 되는 TV 방송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McCarthy는 계속 의사진행을 방해하였 으며 증인들을 혹독하게 심문하여서 그간 들어나지 않았던 그의 잔인성이 여실히 공개되었었다고 한다. 국민들간에 그의 영향력은 급격히 하강되었고 상원은 그 몇달후인 1954년 12월에 상원의 품위와 전통을 깨트렸다는 이유로 그를 징계하였으며 McCarthy 시대도 끝나게 되었었다고 한다.
1956년의 총선거가 또 닥쳐왔다. Ike는 심장마비를 경험하는 등 건강이 다소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Nixon부통령과 함께 다시 대통령후보로 공천되었다. 민주당측에서는 Stevenson이 그의 공천경쟁자였던 Estes Kefauver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하여 대통령후보로 다시 공천되었다. Ike 의 재임중에 미국의 경기가 좋았었고 그의 인기 또한 계속 좋았었다. Stevenson의 선거운동은 지난번 선거때에 비해서 다소 맥이 빠져 있었다고 한다. Ike는 3,550만표를 받아서 41개주에서 승리하였으며 Stevenson 은 2,600 만표를 받아서 7개주에서만 이겼었다. 또 한가지 특기 할만한 일은 Ike는 지난번 선거때 보다 더 많은표를 얻어서 압승하였으나 국민들은 민주당의 국내 정강정책을 더 지지해서 민주당은 1954년때 보다 더 많은 상하원의석을 확보하여 더강력한 다수당이 되었는데 이와같은 선거결과는 100여년만의 일로서 그리 자주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었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 도처에서 가난하고 굶주려왔던 사람들과 식민지 억압 속에서 인권을 박탈당한 채로 지내오던 사람들이 더 개선된 생활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세계 사방에서 식민국가들이 식민굴레를 벗어나고 있었는데 특히 Africa에서는 Ghana 가 1957년에 영국에서 독립한것을 필두로 1965년에 이르러 서는 30개의 신생 UN 회원국들이 생겨났다.
미국내에서도 뿌리깊은 인종차별에서 오는 흑인들의 갈등이 표명화 되기 시작하였다. 전쟁중 백인들 옆에서 전세계의 자유, 인권,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고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해서 공장들에서 땀을 흘리고 해외참전으로 시야가 넓어진 흑인들은 막상 자기의 나라에 돌아와서는 열등시민으로 천대받기를 거부하기 시작하였다. 흑인들은 제도적인 흑인차별과 모든 불평등에 대해서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흑인 투표금지는 위헌이다” 대법원 판결
미국의 대법원은 시대의 정서보다 더 보수적일 때도 있었으며 반대로 더 진보적일 때도 있었으나 역사적으로 보면 진보적인 판결을 더 많이한 편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1896년에 “보수적인” 대법원은 흑인들이 흑인전용의 변소, 학교, 객차등을 사용하도록 규정한 법들이 인종차별을 금지한 헌법개정 14조항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결하였다. 흑인전용의 시설들이 “동등” (equal) 하다면 “분리” (separate) 하는것은 헌법위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분리된것이 어떻게 동등할수 있느냐” 라는 불평은 흑인들끼리나 하는 불평이었지 백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이었다.
대부분의 흑인들은 아예 투표권이 없거나 있더라도 백인들의 방해로 투표권을 행사할수 없었던 까닭에 부당한 법과 제도를 바꿀수가 없었는데 대법원은 “한 땅덩어리에 두나라가 존재하는것”이 위헌이 아니라고 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1938년부터 “분리”가 된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동등”할수가 없다는 견해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연방법들에도 위헌적인 것들이 있다는 판결을 하기 시작하였다. 1944년, 1947년, 1953년에 대법원은 드디어 민주당이 공천대회에서 흑인들의 투표를 금지하는 것은 헌법개정 14조항의 위법이라는 판결들을 내놓았다. 그때까지 여러주의 민주당들은 “민주당은 백인들의 사설 club 이다” 라고 하면서 흑인들의 투표를 금지해왔었다.
대법원은 1950년에 Texas에 있는 분리된 Black Law School이 저명한 University of Taxas Law School 과 “동등”할수는 없다고 판결하였다. 드디어 1954년에 대법원은 Kansas주의 Topeka시에 대해서 “Brown vs. Board of Education” 이라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공립학교를 인종별로 분리하는 것은 위헌이다. 모든 미국인은 연령과 학년에 따라 다른 모든 미국인들과 같은 학교에 갈 권리가 있다. 학교를 통합 (integrate) 하는것은 교육과정의 하나이다. 미국인의 이 기본권이 박탈되어서는 않된다.” 라고 판결 하였다. 이제 대법원은 모든 공립학교의 “통합을 명령”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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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LI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