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man 대통령의 임기는 미국이 Asia 에서는 열전에, 기타의 지역에서는 쏘련과 냉전중인 상태에서 끝났다. 미국의 공표된 대공전략은 공산주의가 이미 지배하고 있던 지역에서 더 확산되는것을 방지하는데 있었다. McCarthy 상원의원등의 무절제한 선동으로 미국내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미국내에서나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미국사람들이 두려워 했던 정도로 공산세력이 막중했던 것은 아니었다. 공산주의가 여러지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협 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산주의 라는것이 이념적으로 완전히 통일된 절대적인 세력은 아니었었다. 공산주의가 침투된 각나라도 그나라 대로의 역사와 전통이 있었으며 공산주의와 병행하여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다. 쏘련이 직간접으로 조종하고 있던 나라들도 쏘련이 마음대로 통치하지는 못하였었다.
봉쇄적이며 불안정했던 쏘련도 미국을 두려워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 이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라는 것이 전쟁과 혼돈속에서 필연적으로 멸망하게 되어있는 것이라고 교육을 받아 왔었지만 과학기술의 발달과 안락한 생활에서 오는 미국의 엄청난 국력에 감동되어 있었다. 그들도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전세계가 종말을 보게될것 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결국은 미국과 쏘련은 공존할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미국과 쏘련을 주축들로 하여 전세계가 이념적 분열과 대립으로 국제관계가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고 반목의 상징으로 화산이 폭발한것 처럼 일어난 한국전쟁이 아직 계속되고 있던 1952년에 미국은 대통령을 포함한 총선거에 들어갔다. Truman 의 임기가 끝날때 까지 20년동안 민주당이 정권을 잡아왔었다.
그동안에 미국은 대공황을 극복 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으로 승전하였으며 열전과 냉전을 해오던중 한국전쟁에 또 참전 하게 되었었다. Truman 은 불출마를 발표하였었고 미국민들간에는 “정권 한번 갈아보자” 라는 mood 가 조성될때도 되었었다. FDR 과 Truman 은 가장 “우수한” 대통령들로 공인 되는 정치인들이 었지만 1952년에 한국전쟁은 언제 끝날지를 몰랐었고 미국은 inflation 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중국은 이미 모택동에게 넘어 갔는데 Truman 대통령 측근을 포함한 몇사람들의 부패가 들어나기도 하였었다. 공화당이 집권할수있는 좋은 기회가 온것이었다.
1952년 7월의 공화당 전당대회는 활기에 넘쳤었다. 대통령후보로 당내 보수파들은 Robert Taft 상원의원을 지지하였었는데 융통성이 있는 국제관계를 지지하던 당원들은 Dwight David “Ike” Eisenhower 장군을 후보자로 “징발” 하였었다. Taft 는 오래전부터 FDR 의 New Deal 정책을 강렬하게 비난해 오던 정통 보수주의자 로써 New Deal 정책을 지지했던 일부 공화당원들을 “Me too Republicans” 라고 비난했던 사람이었었다.
전쟁 영웅이었던 Eisenhower 는 첫번째 투표에서 대통령후보로 공천되었으며 부통령후보에는 하원의원으로 있다가 1950년에 상원의원이된 젊은 California 정치인 Richard M. Nixon 이 공천되었었다. 하원의원 시절 악명 높았던 HUAC(반미활동 조사위원회) 에서 “공산당소탕”전에 이름을 날렸던 Nixon 은 2년전의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 소속의 여성후보자를 “빨갱이”로 몰아 치는등 험악한 선거운동을 하였었는데 그의 부인 Patty Nixon 여사는 이때부터 정치에 환멸를 느꼈었다고 후일 회고하였다 한다.
공화당은 민주당이 외교정책의 실패로 중국을 잃었고 한국전쟁이 나도록 만들었다고 비난했으며 공산주의의 확산을 방지하는것 만으로 충분하지않고 철의 장막속에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내에서는 균형예산을 짜고, 국가채무를 줄이며 청렴한 정부를 만들겠다고 약속하였다.
민주당은 전당대회로 모였는데 Truman 이 불출마하는 가운데 두번의 투표에서도 대통령후보를 공천하지 못하였다. Truman 의 추천을 받으며 물밑운동만 하다가 아주 재치있게 전당대회 개회연설을 했던 Illinois 주지사 Adlai E. Stevenson II이 즉석에서 “징발”되어 대통령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Stevenson 은 때로는 상스러울 정도로 당차던 Truman 과는 아주 대조적인 “양가출신의 귀골 정치인”이었었다. 그는 Grover Cleveland 대통령의 부통령이었던 Adlai Ewing Stevenson 1세의 손자로써 Princeton 대학교를 졸업하고 성공한 변호사로써 최고의 학식에다가 연설을 아주 잘하는 정치인이 었었다. 그는 인기높은 전쟁영웅과의 선거가 어려운것임을 알면서도 후보직을 수락하였고 Alabama 주의 John J. Sparkman 상원의원이 부통령후보가 되었다.
쇠를 끄는 자석처럼 ‘매력적’ 인 미소를 가졌던 전쟁영웅 Ike
Stevenson 은 미국 대통령 선거사상 가장 신사적인 선거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의 학식과 재치에 넘치는 열변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람들에게 “Ike” 라는 별명으로 불리우 면서 친근감과 사람을 끄는 미소를 가진 전쟁영웅을 이겨낼수는 없었었다. “Ike” 는 그의 형제들 모두에게 붙혀진 middle name 인데 “like” 와 발음이 비슷하여서 공화당은 “I like Ike” 라는 선거 button 을 배포하고 선거구호로도 썼었다고 한다.
Ike 는 원래 성질이 급하였으나 화를 조절하는 훈련이 잘된 사람이었다고 한다. 1930년대말에 비율빈에서 대령으로 열살 년장인 MacArthur 장군밑에서 5년여 근무한 적이 있는데 다소 불편한 관계이었을 적도 있었다고 한다.
Ike 의 대통령 후보론이 대두할 무렵에 그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보기를 원했었다는 MacArthur 장군이 “Eisenhower 는 내가 데리고 있었던 부관들중에 가장 우수한 부관이었다” 라는 해석에 따라 다르게 들릴수도 있는 묘한 발언을 해서 화제가 된적이 있었다고 한다.
Ike 는 소령으로 16년간을 지냈었으나 1941 년에 준장이 된후 10년안에 육군원수까지된 인물이기도 했다. 일선전투 지휘관으로 이름을 얻었다기 보다는 작전등으로 명성이 났었다고 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말 연합국 총사령관으로써 Normandy 작전을 지휘할때 여러나라의 장군들을 잘 화해시켜 가며 통솔하였 었다고 한다.
그와 같이 참전하였던 영국의 Montgomery 원수는 “Ike 가 누구한테 이든간에 미소를 지으면 마치 쇳가루가 자석에 끌리듯이 그를 곧 믿을수 밖에 없게 만드는 인물”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Ike 는 선거중에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국을 직접 방문하고 종전을 시키도록 노력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규탄하고 정부의 부패를 척결하겠다고 하였다. 당시의 미국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한 선거공약이 었었다.
대통령선거에 6,100만명이 투표하였는데 Ike 는 3,360 만표로 남부 여러주들을 포함한 39 개주에서 승리하여 선거인단표 442표를 받았고 Stevenson 은 2,660 만표를 받아 남부주들 9개에서 승리하여 선건인단표 89표를 받아 낙선되었었다.
Ike 의 압승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은 상원에서 1석, 하원에서8석을 더 가진 근소다수 여당이 되었었는데 이것은 Ike 의개인적인 인기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공화당의 정책을 크게 지지하지 않았었다는 까닭이었다고 한다. 사실상 상원은 여야가 동수이었으나 상원의 사회자로써 일반투표에는 투표권이 없는 부통령이 가부동수일 경우에 갖게되는 결정권이 한표가 있었던 까닭에 한표가 더 많은 셈이 되었었다.
진담인지 지어낸 말인지 모를 얘기가 하나 있다. Ike 는 한국전에 참전중이던 아들 John Eisenhower 대령 (Nixon 대통령의 둘째딸 Julie Nixon 의 남편인 David Eisenhower 의 아버지) 이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대통령 취임식에 나타나자 “웬일이냐?” 라고 물었었는데 옆에 있던 Truman 대통령이 “내가 특명으로 오라고 했오” 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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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LI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