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걸리버 여행기와 치매노인

2018-01-17 (수) 이철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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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다시 읽어보면 그의 예리한 인간분석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4부로 구성된 ‘걸리버 여행기’는 소인들이 사는 릴리푸트, 거인이 사는 브롭딩낵, 날아다니는 섬인 마법사의 나라 라푸타, 그리고 말이 이성적 존재로 등장하는 후이늠의 나라로 나뉘어져 있다.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에서 강조한 것은 인간의 모든 가치는 궁극적으로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걸리버는 소인국에서는 거인이 되고 거인국에서는 소인이 된다. 비교라는 개념 없이는 인간세계에서 어떤 문제도 크거나 작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을 걸리버가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인 스위프트는 인간가치의 판단에 있어 절대적인 기준이나 이데올로기를 배격한 사상가다.

그런데 ‘걸리버 여행기’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3부의 라푸타라는 나라다. 스위프트는 인간이 수명만 길어지면 과연 행복해질까를 라푸타의 사람들을 통해 다루고 있는데 그 시각이 오늘의 노인세계를 미리 내다본 것 같은 혜안을 보여주고 있다.


라푸타에는 스트럴드브럭(struldbrug)이라는 불사(不死)의 인간들이 살고 있는데 걸리버는 이들을 매우 부러워한다. 그러나 이들의 생활은 자세히 들여다보니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불사이긴 하지만 불노(不老)가 아니기 때문에 늙어서 병든 이들은 인간취급을 못 받고 살고 있는 것이다. 기억력이 약해져 80세가 되면 법적으로 재산권을 비롯하여 일체의 법적 권리를 빼앗겨 사망자 취급을 당한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죽기를 원하지만 죽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이웃마을 노인들의 장례식을 가장 부러워한다.

얼마 전 코미디언 자니 윤이 치매를 앓고 있다 하여 한국 TV뉴스가 온통 난리를 피운 적이 있다. 백발이 된 그의 모습은 너무나 안쓰러웠다. 나는 그와 LA에서 한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만날 때마다 스트레칭을 시범 보이며 “매일 아침 5종류의 과일을 섞은 주스를 마시고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면 늙어도 절대 치매에 안 걸린다”며 몸매를 자랑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던 자니 윤이 치매에 걸렸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일본은 지금 치매노인 증가현상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한 달에 가출노인신고가 수백 건에 이른다. 치매노인은 왜 늘어나는가. 평균수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인구의 고령화가 수반하는 비극이다.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대법관인 샌드라 오코너는 남편의 치매(알츠하이머)를 돌보기 위해 종신직인 대법관을 마다하고 은퇴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요양원에 있는 남편을 면회 갔더니 다른 여성과 팔짱끼고 걸으며 키스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오코너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에게 “당신이 다른 여성을 사랑해도 당신만 행복하다면 나는 기뻐요”라고 말해 주위 사람들이 눈시울을 적셨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에피소드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노인들은 85세가 넘으면 치매 걸릴 확률이 20-40%이라고 한다. 자니 윤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니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분명히 축복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장수현상은 빛과 그늘을 수반하고 있다. 치매에는 약이 없다. 치료가 불가능하다. 환자의 현상지연이 최선의 치료다. 오래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100세 시대에서 현대의학은 이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1726년에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를 통해 이미 과학의 한계와 인간관계를 내다보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철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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