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88)제33대 Truman 대통령②

2017-12-29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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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많은 “이유없는 살육들”을 한 제2차 세계대전을 하면서 “야만스러운” 독일을 멸망시키고 악독스러운 무력팽창주의 일본을 패망 시켰음으로 이론적으로는 세계의 평화와 안녕이 찾아왔어야 맞는다. 그러나 전쟁은 새로운 문제들을 대량 생산해 내었다. 더욱 발달된 무기로 인류의 생존이 도망할 구석도 없이 더욱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이념의 분리로 세계는 더욱 심각하게 분열이 되었으며 “열전”보다 더 무서운 “냉전”으로 전인류는 다시 떨게 되었다. 외계의 지구관찰자는 인간이란 “두뇌가 너무 작아서 미래를 생각할수 있는 능력이 없는 하급 동물들이다” 라고 결론을 지을것 같다.

인간이 미래를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국제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Wilson 대통령의 끈질긴 호소에도 불구하고 상원의 비준을 받지못하여 미국이 League of Nations 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동안에 미국은 전쟁보다는 대화를 통해 국제분쟁을 해소해 보려는 목적으로 United Nations 를 창설하는데 앞장 섰었다.

UN의 창립, 냉전속에서’철의 장막’ 으로 양분되는 세계
미국, 영국, 쏘련은 1943년에 기대했던 역활을 해내지 못했던 League of Nations 를 대치할 새 세계기구 UN을 창립하는데 동의하였다. 1944년에 Washington 의 Dumbarton Oaks Estate 에서 가진 회담에는 중국도 참가하여 4개국은 상세한 UN창립계획에 합의 하였다. 1945년 4월 12일에 San Francisco 에서 50개국 대표 200명이 모여서 UN이 창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아직 진행중이던 때이었다.


쏘련과 미국은 창립때부터 이견이 있었었다. UN 의 심장부 역활을 할 안전보장 위원회 (Security Council) 에서 상임회원국들이 Veto (거부권) 을 가져야 한다는 데에는 양국이 동의 하였으나 미국은 자국의 이해관계가 있는 사항에만 Veto 를 할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에 쏘련은 모든 사항들에 Veto 를 할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 하였었다. 미국은 무제한적인 Veto 는 UN 을 마비 시킬수 있다고 주장 하였었다. 이와같은 의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UN헌장이 작성되어서 UN 은 창립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후 창립된 League of Nations 의 참여를 거부하였던 미국의 상원은 1945년 7월 28일에 UN헌장을 82 대 2 로 비준하였다. 국제기구의 참여나 방위조약등의 체결등이 국회의 최종심의, 의결권을 침해 할수 있다는 우려에서 쉽게 가입하지않는 미국의 전통을 깨는 상원의 비준이었다. WW II 를 거치면서 국제관계에서 강력한 군사력과 병행해서 대화와 타협이 필요한 것이라는 인식을 할만큼 미국이 국제정치에 성숙해진 것이었다.

UN 은 국제평화와 인류생활의 개선을 위하여 창립된것이다. 창립후 한동안은 쏘련의 거부권 남용으로, 또 근래에는 미국의 거부권 남용으로 UN 이 마비되어가고 있다는 느낌도 주었고 국제분쟁들을 효과적으로 다 막아내지도 못하였지만 그나마 UN 이 없었다면 국제정치가 지금보다 더 어려워 졌었을 것이라고 말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 좋은 예가 “미국은 Jerusalem 을 Israel 의 수도로 인정한다” 는 철따구니 없는 소리를 Trump 대통령이 한후 불과 몇일만인 지난주에 UN 총회가 반대 128표, 찬성 9표, 기권 35표라는 압도적인 의결로 미국을 즉각적으로 면박을 주었는데 만일 UN 이 없었다면 그와같은 신속한 국제여론의 반영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역사는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한 완전한 대화의 단절이 전쟁을 초래 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WW II 이후의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더러는 민주주의라고 오해되기도 하는) 의 이념분쟁,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쏘련과 미국의 경쟁과 대립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순수공산주의” 나 “순수자본주의” 가 제도적으로는 이미 없어진 오늘날에도 “이념간의 분쟁” 은 불꽃이 튀고 있다.

Yalta 회담때의 약속들을 모두지키지 않은 쏘련에게 골탕을 먹었다고 생각했던 서방세계는 쏘련이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세계공산주의화” 를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쏘련을 불신하고 쏘련이 많은 국제분쟁의 진원지라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었던 Truman 대통령은 쏘련의 “흉계”를 폭로하기 위하여 역시 반공주의자이었던 Churchill 수상을 Missouri 주 Fulton 시에 있는 Westminster College 에 초청하여 세기적 명연설을 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1946년 3월 5일에 Churchill 은 “지금 Baltic 바다에서 Adriatic 바다에 까지 이르는 유럽에 ‘철의 장막 (Iron Curtain)’ 이 처지고 있읍니다” 라고 쏘련의 세계공산화 흉모를 비난함으로써 “철의장막” 이 공산압제를 상징하는 문구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무렵 쏘련의 흉모를 입증이라도 하는듯한 일련의 사태들이 일어나고 있었었다. 쏘련은 주변 국가들 전부가 공산국가들이 되도록 만들어 가고 있었으며 약속을 어기고 Iran 에 계속 쏘련 병력을 주둔시켰으며 Turkey에게는 군사기지들을 쏘련에게 주고 쏘련의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Turkey의 해협을 쏘련 해군이 쓸수 있도록 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었다. 1946년 가을에 Greece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주변 공산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반란세력들이 우파정부를 공격하였었다. 그무렵 Canada에서는 국회의원 한명을 포함한 쏘련의 스파이조직이 발각되었고 원자탄에 관한 비밀이 쏘련에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었다고 한다.


과연 쏘련은 전세계를 공산화 시키겠다는 의도 이었을가? 주쏘 미국대사 George F. Kennan 과 Dean Acheson 국무차관등은 앞으로 쏘련의 영향권이 더 확대되지 않도록 견제하지 않으면 썩기 시작하는 사과 한알이 같은 상자에든 모든 사과를 썩게 만드는것 처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가 공산화 위협을 받게될 것이라고 경고 하였었다.

Truman 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Greece 나 Turkey 처럼 국력이 약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는 미영등 서방 국가들이 경제, 군사적인 원조를 하여서 공산화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The Truman Doctrine 이라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시작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미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George C. Marshall 국무장관과 Acheson 차관은 구체적인 원조방안을 구상하였고 Truman 대통령은 1947년 5월에 Greece, Turkey 원조법이 입법되도록 하였다. 이법에 따라 Greece 에는 3억불, Turkey 에는 1억불이 원조되었으며 동시에 원조액이 제대로 사용되는것을 감독하기 위해서 미국 관리들과 군인들이 파견 되었었다. Greece 와 Turkey 에서 즉각적인 성공을 거둔 The Truman Doctrine 은 그후에도 지속되어온 정책이다. 쏘련은 이 원조를 전쟁도발 이라고 비난하였으며 친쏘주의자로서 FDR 의부통령을 지낸후 Truman의 상무장관을 하고 있던 Henry Wallace가 이 원조를 비난 하다가 Truman 에게 파면 되었었다.

불란서와 이태리에서까지 공산주의자들이 태동하고 있을 정도로 유럽이 혼란스러웠던 1947년 6월에 Marshall 장관은 Harvard 대학교에서 한 연설에서 “Marshall Plan” 이라 고도 불리우는 European Recovery Program 을 제안했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곤경에 빠진 유럽을 구출하자면서 쏘련의 동참까지 요청한 이 제안에 쏘련은 위성국가들에게 원조를 받지말라고 명령하며 반대하고 나서자 미국 국회는 도리어 역영향을 받아 10개월의 토의 끝에1948년 4월에 압도적인 다수표로 입법을하여 53억불을 다음해에 유럽에 원조하였었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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