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더 깊어진 트럼프의 ‘러시아 늪’

2017-12-07 (목) 박 록 주필
작게 크게
러시아 스캔들이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 개입 의혹을 수사해온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가 트럼프 캠페인 선거 본부장 폴 매너포트 등 3명을 기소한지 한 달 만이다. 다시 뉴스의 조명 속에 드러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늪’은 한층 더 깊어진 듯 불길해 보인다.

지난 주말 워싱턴은 두 개의 빅뉴스가 맞물리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트럼프와 공화당이 학수고대해온 세제개혁 입법화의 사실상 마지막 관문인 상원 통과가 금요일 자정을 넘겨 실현되었지만 그 ‘승리’의 기쁨은 상당부분 빛을 잃었다.

한나절 전에 터진 뮬러 특검의 ‘러시아 폭탄’ 때문이었다. 트럼프 백악관의 전 국가안보 보좌관 마이클 플린이 러시아 스캔들과 관련해 연방수사국(FBI) 조사에서 허위 진술했음을 인정하고 특검수사에 협조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힌 것이다. 특검 수사가 시작된 이후 ‘가장 드라마틱한 이벤트’로 꼽힌다.


예상을 못 했던 것도 아니고, 구체적 증거를 제시한 것도 아직은 아니지만 플린의 플리 바긴(유죄 시인을 조건으로 한 형량조정)은 몇 가지 측면에서 지난달 3명의 기소와는 그 비중이 다르다.

트럼프 측근과 러시아 관계자의 접촉에 대한 수사에서 이번 진전의 의미를 예일 법대 아샤 랜가파 교수가 한마디로 설명해준다 : “누가 언제 무엇을 알았는가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장본인이 플린이며, 뮬러는 이제 그의 협조를 얻게 된 것이다”

플린이 누구인가. 트럼프의 선거 전과 후, 고위 참모 중 하나로 트럼프 최측근에 속한다. 가장 먼저 후보 트럼프를 지지했던 인사이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투옥하라는 “Lock her up!”의 구호를 선창했고 트럼프 당선 불과 9일 후 그의 국가안보 보좌관으로 임명된 플린은 당시 가장 파워플한 실세 중 한명으로 등극했었다.

그의 유죄 인정은 특검 수사가 트럼프 이너서클을 뚫고 들어갔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USA투데이는 분석한다. 지난달 러시아 관련 허위 진술 혐의를 인정했던 캠페인 참모 조지 파파도풀러스에 대해 ‘이름도 모르는 하위직 자원봉사자’라고 일축했던 백악관과 트럼프의 대응이 이번엔 통할 수 없다는 뜻이다.

플린의 기소는 캠페인 중이 아닌 당선 후 행적에 대한 혐의를 인정한 첫 번째 케이스이며, 트럼프 정권인수팀이 직접 관련된 첫 번째 케이스이기도 하다. 플린은 지난해 12월 오바마 정부의 러시아 제재 및 유엔 안보리의 이스라엘 규탄 결의안에 대해 러시아 대사와 몇 차례 통화했음을 인정했는데 접촉 및 대화 내용은 자신의 독단적 결정이 아니라 당시 트럼프 별장인 마라라고에 머물던 정권인수팀 ‘고위 관계자’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그 ‘몸통’이 누구냐는 의문에 상당수 미디어들은 즉각 트럼프의 사위 재럿 쿠슈너를 지목했다. 가디언지는 플린이 지난달 특검 협조를 결심하고 트럼프 변호인단에 더 이상 논의하지 않겠다며 결별을 통보한 후 쿠슈너의 모습이 공개석상에서 사라지는 등 영향력 감소가 눈에 뜨이게 드러났다면서 “다음은 누구인가”라는 요즘 워싱턴에서 회자되는 화두를 다시 던지기도 했다.

정권인수팀의 최고 실세였던 쿠슈너가 지시했다면 “과연 트럼프가 몰랐을까” - 극히 상식적인 의문과 함께 “뮬러 특검이 백악관의 문을 열었다”는 미디어들의 보도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공격을 받거나 궁지에 몰리면 트윗 본능이 발동하는 대통령의 특성은 이번에도 발휘되었다. 논란을 키워 화를 자초하는 결과도 여전했다. 플린의 허위진술이 백악관과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겠지만 “내가 플린을 해임해야 했던 것은 그가 부통령과 FBI에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어? 플린의 허위 진술을 알면서도 제임스 코미 FBI국장에게 수사중단을 요청하고 안 들어주자 해고까지 했어? 사법방해를 자인하는 것인가?”…당장 보도에 불이 붙었다.

깜짝 놀라 혼비백산한 것은 트럼프의 변호인단이었다고 CNN은 그 뒷이야기를 전한다. 혼란의 와중에서 대응에 나선 한 트럼프 변호사의 발언도 수류탄 급이었다. 최고 법 집행자인 대통령에겐 사법방해 혐의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대통령은 초법적 존재인가” “현직 대통령에 대한 재임 중 형사 기소가 가능한가” 다시 와글와글…설전이 시작되었고 전문가들의 분석도 엇갈렸다.

어제 하원에선 일부 민주당의원들이 추진한 트럼프 대통령 탄핵 결의안이 압도적 표차로 부결되었다, 대통령의 위법행위가 명확히 드러나지도 않은 상황이니 당연하다. 민주당 지도부도 공개적으로 반대를 표명했다.

트럼프 반대진영은 탄핵에 가까워졌음을 확신하며 여론의 역풍이 불지 않도록 특검의 최종보고서가 나올 때까지 인내할 것을 다짐하고 있고, 트럼프 지지층은 감세안과 법원의 보수화 등 트럼프의 업적을 강조하며 특검 수사 자체를 마녀사냥으로 폄하한다.

정계만이 아니라 전국이 양분되어 대립하는 상황에서 신중하게 말을 아끼고 있지만 뮬러의 수사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특검의 두 가지 핵심 이슈인 미 대선에 개입하려한 러시아와 트럼프 캠페인 팀의 연루 의혹과 대통령의 사법방해 여부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플린의 협조로 수사는 점점 더 속도를 낼 것이다.

한 달 후엔 또 어떤 폭탄이 터질지 예측불허이긴 하지만 혹한의 ‘러시아 겨울’이 트럼프에게 한동안 계속될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박 록 주필>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