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반 트럼프 물결의 승리…그 후(後)

2017-11-16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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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여신이, 드디어, 민주당을 향해 손짓하는 것일까. 1년간 긴 자성의 시간을 보낸 민주당에게 지난 열흘은 최고의 시기였다. 7일 버지니아를 비롯한 지방선거에서 싹쓸이 완승을 거둔데 더해, 공화당 텃밭 앨라배마 연방상원 보궐선거의 공화후보 성 추문이 이번 주 들어 일파만파 확대되면서 꿈도 안 꾸었던 상원 장악 가능성에도 한 줄기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공화당 천하 트럼프 시대에 어떻게 모멘텀을 되살릴 수 있는가를 이번 선거에서 체험으로 습득한 민주당이 이제 직면한 도전은 이 승리의 물결을 어떻게 내년 중간선거까지 전국적으로 확대시킬 것인가이다.

버지니아, 뉴저지, 워싱턴 주 등으로 이어진 선거 승리의 동력은 ‘반 트럼프’ 저항의 물결이었다. 월스트릿저널도 이번 승리를 통해 반 트럼프 연합의 구성 그룹 실체가 확인되었으며 반 트럼프의 에너지가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 될 만큼 막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분석했다.


고소득·고학력의 백인들, 밀레니얼 세대, 소수계, 교외지역 거주 여성들과 독신여성들로 이루어진 반 트럼프 연합의 힘은 특히 버지니아 선거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접전으로 예상되었던 주지사 선거에서 별 특징 없는 중도파 민주당 후보에게 9포인트나 앞선 놀라운 승리를 안겨주었으며, 이들의 뜨거운 에너지 물결은 악명 높은 게리맨더링 선거구 획정으로 공화당이 장악해온 주의회 선거에서도 개가를 올리게 했다.

저조했던 로컬선거의 투표율을 부쩍 끌어 올려 풀죽었던 민주당 표밭에 아연 활기를 불어넣으며 저력을 입증한 반 트럼프 물결의 함성은 “2018년까지!”를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투표 내용을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버지니아 승리의 지나친 확대 해석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버지니아 선거구 중 민주당이 승리를 거둔 곳은 부유한 백인들의 교외와 칼리지타운, 소수계 밀집 도심지역들이다. 중남부 버지니아의 보수지역 ‘트럼프 컨트리’는 뚫지 못했으며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에 등 돌렸던 백인 근로계층은 여전히 공화당지지 표밭이었다.

모처럼 얻은 기회를 망치지 말라! 자만하지 말라! 자아도취에 빠질 여유가 없다! - 민주당을 향해 이어지는 정치 전문가들의 경고와 조언은 다양하지만 결국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 : 트럼프 반대만으로는 부족하다. 트럼피즘에 대한 효과적 대응이 필요하다. 특히 이제 민주당에겐 뼈아픈 실패의 상징 용어가 되어버린 ‘백인 근로계층’을 설득할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민주당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경제 메시지 강화”라고 팀 라이언 오하이오 주 민주당 연방하원의원은 강조한다. 백인 근로계층 선거구 출신인 그가 2018년 민주당 승리의 열쇠로 확신하는 것은 트럼프가 지키지 못하고 있는 공약, 일자리 창출 정책의 강력한 추진이다.

“위기가 기회”라는 경구는 요즘 미국의 정치상황에도 딱 들어맞는다. 민주당을 존재감조차 희미한 소수당으로 전락시켰던 트럼프의 집권은 이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반 트럼프 물결을 몰고 왔으며, 전국에 만연한 반 트럼프 정서는 어떤 공화당 의석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친 민주당’ 정치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민주당 연방하원 장악의 꿈은 이미 무르익어 가고 있다. 현재 의석을 다 방어하면서 공화당 의석 24개를 빼앗아 와야 하는데 타겟을 삼을만한 공화 의석이 91개나 된다. 게다가 은퇴나 다른 공직 도전으로 재선 불출마를 밝힌 공화의원도 25명에 이른다. 공화당보다 높은 지지도는 체감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특히 2010년 센서스 이후 공화당에 유리하게 재획정된 게리맨더링 선거구가 민주당의 꿈을 좌절시키는 가장 높은 장벽이 될 수 있다.

계획에 없던 상원 탈환의 가능성도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공화 후보 로이 모어가 미성년자 성 추문으로 사면초가에 빠지면서 앨라배마에서 20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당 연방상원 진출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하나의 의석이 아니다. 자칫 상원 주도권을 좌우하는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민주당이 상원 다수당이 되려면 내년 선거에서 자당 현 의석을 다 방어하면서 공화 의석 3개를 더 확보해야 한다. 지금까진 네바다와 애리조나 2개주에만 희망을 걸 수 있었는데 전혀 기대치 않은 앨라배마가 다가온 것이다. 물론 성추행 피해자가 5명으로 늘어났는데도 모어에 대한 지지가 여전할 만큼 앨라배마의 보수색채는 상당히 강하다. 그러나 2017년 선거의 최대 이변으로 기록될 ‘반전’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민주당에는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행운의 기회다. 중간선거에선 여당이 패하기 마련이라는 정치의 ‘시계추’ 속성도 민주당에게 유리한 선거환경을 조성해주고 있으며 내년 모든 선거에서 업적을 평가받게 될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도는 계속 바닥에 머물러 있다.

이제 민주당은 승리로 가는 열차에 올라탔다. 내년은 반 트럼프 열기만으로 성공했던 금년과는 다를 것이다. 트럼프 지지층의 충성이 여전히 뜨거울 표밭을 가로지르며 민주당의 열차는 탈선하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운명의 중간선거를 치를 2018년도 불과 한 달 반 밖에 남지 않았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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