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젠 ‘안전지대’가 없다

2017-11-09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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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시골의 지난 일요일 아침, 홀콤 가족은 늘 하던 대로 작은 교회에 모여 예배를 보고 있었다. 막 첫 찬송을 끝낸 순간, 그들 중 8명이 죽었다. 그날의 초청목사였던 브라이언 홀콤 부부가 죽었다. 그의 아들 마크도 죽었다. 임신 중이었던 며느리도 죽었다. 4명의 손자손녀도 죽었다. 가장 어린 노아는 겨우 한 살 반짜리 아기였다. 1800년대부터 뿌리 내려온 이 마을에서 대대로 화목하게 모여 살던 ‘올 아메리칸 패밀리’였다.

전투용 소총과 400발 이상의 대용량 탄창으로 중무장하고 난입한 20대 가정폭력 전과범은 “모두 죽는다”라고 욕설 섞어 외치며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그렇게 약 7분 동안 총탄이 쏟아져 내린 현장은 참혹했다. 거의 모든 교인들이 총에 맞았다. 26명이 죽고 20여명이 부상당했다. 상당수가 아이들이었다. 네 자녀를 데리고 예배를 보던 젊은 엄마는 자신의 몸으로 아이들을 최대한 감싸 보호했지만 두 딸과 함께 숨졌다.

너무 잦은 총기난사에, 너무 빠르게 묻혀버리는 그 참담한 결과에 익숙해진 미국인들에게도 쉽게 잊힐 수 없는 잔인한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안전지대가 없다”는 공포를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58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부상당한 라스베가스 총격 발생 후 불과 한달여 만에 다시 총기 참변이 미 전국을 뒤흔들었다.

금년에 발생한 307번째 ‘대형 난사’로 기록된 이번 사건의 범인은 공군 복무 중 상관을 위협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탈출한 적이 있으며 가정폭력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불명예제대를 당했던 총기구입 금지 대상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4정의 총기를 구입해 범행을 저질렀다. 숭숭 구멍 뚫린 미국의 총기법이 그 집행에서도 얼마나 허술한가를 말해준다.

주류언론들이 전하는 사건 현장은 쇼킹하다. 녹화된 교회 동영상에서 범인은 겁에 질려 우는 아이들을 포함한 희생자들을 하나하나 겨냥하며 처형식으로 확인 사살까지 하고 있었다. 못지않게 쇼킹한 것은 다른 어떤 선진국에서도 볼 수 없는, 국민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순식간에 살육의 현장으로 변하는 참사를, 거듭 목격하면서도 재발을 막기 위해 아무 것도 안하는, 아무 것도 안 하려는 정치 리더들의 태도다.

이번 역시 “아무 것도 안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지배적이다. 아예 “총기 문제가 아니다”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즉각적 반응부터 그렇다. 트럼프는 아시아 순방 중에 발생한 이번 사건의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한 후 “최고 수준의 건강문제다…총기 문제가 아니다”라고 규정하며 총기규제 강화론을 일축했는가 하면, 무장한 주민이 교회에서 나온 범인을 쏜 후 추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루 뒤엔 그 주민에게 총이 없었더라면 훨씬 더 많은 사망자가 생겼을 거라면서 ‘총만이 우리를 총에서 구한다’는 전미총기협회(NRA)의 주장을 되풀이하기도 했다.

트럼프의 ‘정신건강 문제’ 주장은 일리가 있다. 폭력적 정신질환자 손에 들린 총기는 시한폭탄이다. 그러나 정신질환자 대다수는 폭력적이 아니며 정신질환이 총기폭력의 예측변수도 아니다. 다른 나라들도 정신질환을 주요 문제로 꼽지만 미국처럼 총기 살해가 많은 나라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 ‘최고 수준의 정신건강 문제’라는 트럼프의 말은 맞다. 무고한 주민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재발 막을 행동을 거부하는 이 나라 최고 지도자들은 ‘확실히’ 정신이 나간 것이다” - USA투데이의 지적이 신랄하다.

“총에는 총으로”의 주장은 NRA 대변인이라면 모를까, 대통령의 말로는 적절치 않다. 별 검증이나 숙고 없이 불쑥 내놓는 트럼프 즉흥 대응의 전형일 것이다. 범인과 맞닥뜨리면 절대 대응하지 말고 피하라는 것은 보수와 진보 관계없이 모든 치안 당국자들의 당부다.


연방의회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당 일각에서 총기규제 강화가 거론되고는 있다. 글자 그대로 ‘거론’의 수준이다. 라스베가스 사건이후 발의되었던 최소한의 규제법인 범프스탁(반자동 소총의 성능을 전자동 소총처럼 강화시키는 장치) 금지법안 조차 흐지부지 유보상태인데 무슨 진전을 기대하겠는가.

범프스탁 금지법의 모처럼 초당적 추진에 ‘혹시나’ 변화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이 고개를 들 무렵 총기 로비가 덮치면서 겁먹은 의원들이 움찔 물러 선 것이다.

총기논쟁을 공공안전 이슈가 아닌 보수 대 진보의 ‘문화전쟁’으로 이끌어가는 총기애호 세력에 휘둘리고 지쳐 대량 살상의 난사 사건이 ‘뉴 노멀’로 정착해가는 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그러나 총기난사는 불가피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숭고한 ‘자유의 대가’도 물론 아니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통령의 주장과는 달리 “이건 우리가 바로 잡을 수 있는 총기 문제”라고 믿을 것이다.

해답도 알고 있다. 근절은 힘들어도 횟수와 사상자를 줄이는 정책을 시행하며 고삐를 잡아갈 수 있다. 현행법 집행을 강화하고 현행법의 맹점을 메우도록 모든 총기구입에 대한 신원조회를 확대하는 한편 대량 살상이 가능한 전쟁용 총기를 금지시키는 규제부터 실현시켜야 한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금년 초 트럼프는 사회보장국이 정신질환 소셜연금 수혜자 명단을 연방수사국 신원조회 데이터베이스에 보고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로 인해 약 45만명 정신질환자가 총기 구입 신원조회를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테러전쟁은 국가안보의 최우선 과제인데, 테러리스트 의심자 명단에 오른 사람도 총기는 제한 없이 구입할 수 있다…

다음 차례는 어디인가. 한 살 아기가, 뱃속의 태아가 엄마의 품안에서 총에 맞아 살해당한 참변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무렵 다시 미국 어디에선가 울릴 요란한 총성이 들리는 듯하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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