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직은 ‘케네디의 법정’ 이지만

2017-10-12 (목)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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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전국이 라스베가스 총기참사에서 눈을 못 떼고 있던 지난 주 미 정계의 시선은 2017~2018년 새 회기를 시작한 연방대법원에 모아졌다. 이렇다 할 획기적 판결 없이 막 내린 작년 회기가 ‘폭풍 전 고요’로 비유되었으니, 이제 그 ‘폭풍’ 속으로 들어 선 것이다.

이번 회기 최대 이슈로 꼽히는 ‘게리맨더링’ 소송 심리는 개정 벽두부터 전개되었다. 특정 정당에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조작하여 재획정하는 당파적 게리맨더링에 대한 위헌심리다. 정계와 학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그 결과에 따라 1960년대 투표권법 이후 미 선거정치에 최대 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며 주시한다.

게리맨더링은 미국의 역사와 함께 해왔을 만큼 오래된 정치 관행이지만 태생부터 비민주적인데다 그 정도가 심화되면서 민주제도 자체에 훼손을 끼치는 지점에 이르렀다. 제동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법정에 서기도 했고 인종차별적 게리맨더링에 대해선 위헌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공화당에 유리한 재획정을 문제 삼아 민주당 유권자들이 제기한 이번 위스콘신 주 소송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 당파적 게리맨더링은 유권자의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대법원이 그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어떻게 합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가.

2010년 수십년만에 주 의회의 다수당이 된 위스콘신 공화당이 이 주도권을 계속 확보하기 위해 2011년 게리맨더링 수법으로 선거구를 재획정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후 첫 주의회 투표에서 전체 득표율은 48%에 그쳤으나 의석수는 99석 중 60석을 차지하는 압도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 다음 선거에서도 결과는 비슷했다. 공화당은 이렇게 다수당을 유지할 것이고 공화당이 다수당을 유지하는 한 선거결과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아무도 이 관행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게리맨더링의 덕을 보았지만 ‘악(evil)’이라고 비판했던 1880년대 제임스 가필드로부터 “반 민주적, 비 미국적, 국가적 스캔들”이라고 지적했던 로널드 레이건까지 공화당 대통령들도 혐오했고 미국인 10명 중 7명이 반대하는 것이 게리맨더링이다.

연방대법관 누구도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극단적이 되어 헌법에 위배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무효화 시키지는 않았다. 보수·진보 대법관들의 해결책이 팽팽히 맞서왔기 때문이다. 개정 이틀째인 4일, 이번 심리에서도 양쪽의 의견은 확연하게 갈렸다.

“귀중한 투표권이 달린, 민주주의 위기를 대변하는 문제다. 대법원이 개입해야한다”고 진보 대법관들은 주장하고, 보수 대법관들은 “게리맨더링은 혐오스럽다”면서도 “한 정당에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선거구 재획정에 위헌판결을 내린다면 사법부의 권위와 적법성이 손상될 수 있다”면서 정치문제에 대한 사법부의 개입을 꺼려한다.

보수와 진보가 4대4로 맞선 게리멘더링 소송의 판결은 이번에도 앤소니 케네디 대법관의 의중에 달렸다. 2004년 당파적 게리맨더링 케이스에서 보수 쪽에 서서 대법원 불개입 판결을 결정지었던 케네디는 판결문을 통해 앞으로의 당파적 게리맨더링 소송을 다루게 될 경우, 표현의 자유에 근거해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었다.

4일 케네디가 위스콘신 주 변호사에게 던진 질문은, 이제 대법원이 개입하여, 게리맨더링에 제동을 거는 변화의 때가 온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어느 주가 언제나 한 정당에게 혜택을 주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면 그것은 합헌입니까?” - 케네디가 물었다. 대답을 우회하던 변호사는 케네디의 재추궁에 결국 대답했다 - “예, 그건 위헌입니다”


케네디의 마음잡기에 집중하는 것은 게리맨더링 변호사들만이 아니다. 위스콘신을 비롯한 상당수의 주의회와 연방하원의 판도까지 바꿀 수 있는 게리맨더링 소송이 이번 회기 가장 중요한 이슈라면 가장 뜨거운 케이스로 꼽히는 이른바 ‘웨딩케이크’ 소송의 판결여부도 케네디에 달려있다. 나머지 8명 대법관은 4대4로 의견이 갈린 상태다.

동성커플의 웨딩케이크 주문을 거절했다 소송당한 후 패소한 콜로라도주의 빵집주인이 종교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며 상고한 케이스다. 변호단이 내세운 쟁점이 흥미롭다. 종교자유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다. 변호인은 빵집주인을 ‘케이크 아티스트’로 표현했고 그를 지지하는 트럼프 행정부는 대법원이 사진사, 플로리스트, 뮤지션 등 ‘표현적’ 직업에 종사하는 업주들에겐 동성결혼 동참을 거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한된’ 예외조항을 두도록 촉구했다.

대법원에서 동성애자 차별법을 무효화 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온 케네디는 그러나, 한편으론 ‘표현의 자유’를 일관되게 대변해온 단호한 옹호자이기도 한다. 동성애자 차별금지와 케이크 아티스트의 표현의 자유 중 케네디는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 그 결과를 점쳐볼 수 있는 소송의 심리는 추수감사절 연휴가 지난 후 12월초에 열릴 예정이다.

이번 회기는 정계 못지않게 사법부도 양극화 되었음을 보여주는 5대4 판결을 양산할 것으로 보인다. 소수의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노조와 근로자의 권리 약화 등 거의 보수의 승리가 예상되는 ‘보수 대법원 시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폴리티코는 “이번 회기는 내년 가을에 시작될 다음 회기의 서막에 불과하다”고 경고한다.

중도보수 케네디가 법조계의 추측처럼 은퇴한다면 닐 고서치 새 대법관 보다 더 강경보수의 젊은 대법관이 입성할 것은 확실하다. 어떻게 될까. 당장 보수진영의 최대 타겟인 낙태권과 어퍼머티브 액션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민자의 권리는 또 어떤 비바람에 흔들리게 될 것인지…힘없는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연방 대법원의 내일이 상상만으로도 두려워진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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