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이 필요한가”

2017-10-05 (목) 박록 주필
작게 크게
지난 일요일 밤 평화로운 야외 콘서트를 한순간에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몰아간 스티븐 패덕은 49정의 총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중 상당수는 공격용 무기였다. 10분 남짓 동안 5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자살한 패덕의 32층 호텔방엔 기관총처럼 개조한 반자동 소총과 대용량 탄창 등 공격용 살상 무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13년 전 연방의회가 공격용 무기판매 금지법 연장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라스베가스 콘서트장에서, 올랜도 나이트클럽에서, 그리고 샌디훅 초등학교에서의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러나 희생자 수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어떤 총기법으로도 모든 총격범행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처럼 쉽게, 그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어렵게는 할 수 있다. 총기규제는 그런 것이다.

라스베가스 참사가 발생한 10월1일은 금년 들어 273일째 날이었고 273번째 대형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대형 난사사건이 전국을 뒤흔들 때마다 미국은 비슷한 의식을 치른다. 정치가들은 다투어 ‘위로와 기도’를 전하고, 희생자들을 위한 조기와 묵념, 부상자들을 위한 헌혈과 성금이 이어진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당할 수 있다는 공포와 충격을 공유하며 희생자들과 슬픔을 나누는 애도의 시간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는 위로의 말 이상의 대처가 필요하다. 재발을 막기 위해 지금 한 걸음이라도 내딛지 않으면 비극은 더 악화된 상태로 계속된다는 것을 매년, 매달, 매일 미국인들은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다.

총기 참극이 발생할 때마다 되풀이 된 정치권 반응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지난 수십년 성사시키지 못한 총기규제 강화를 다시 촉구하고, 공화당은 “비극을 정치화하지 말라…지금은 애도하며 기도할 때다, 그런 논의를 하기엔 아직 이르다”라고 일축한다.

온 미국이 총기폭력의 끔찍함을 생생히 체감하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가 대책 마련을 논의할 ‘적절한 때’라는 것일까. 총기대책 논의는 너무 이른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늦었다.

“정치화 말라”도 어불성설이다. 국민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무차별 총격에 무너지고 있는 이 ‘위기’에 대처하지 않는다면 정부와 정치의 존재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교통사고 사망률이 높아지면서 정부는 안전벨트 착용을 의무화 시켰고, 여객기가 추락하면 즉각 거론되는 것이 항공안전 대책이며, 알카에다 공격에 테러전쟁이 시작되었다.

정치화 하지 않으면 입법화 할 수 없고 입법화를 못하면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이 교실에서 떼죽음을 당해도, 콘서트와 나이트클럽에서 주말 한때를 즐기던 젊은이들이 난사범의 총구 앞에 사냥감처럼 쓰러져도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 채 다음 참사를 당하게 된다.

개인의 총기소유권을 보호하는 수정헌법 2조에 위배되지 않으면서도 희생을 줄이는 합리적 총기규제는 지난 몇 차례 참극 때마다 추진과 무산, 재추진과 재무산을 거듭해왔다. 공격용 살상무기 및 대용량 탄창 판매 금지와 인터넷이나 총기 쇼를 통한 개인거래까지 포함한 모든 총기 구입자에 대한 신원조회 확대가 대표적이다.


대규모 국제연구에서도 ‘효과 있음’으로 결론지어진, 지극히 상식적인 규제들이 미국의 연방의회에선 번번이 좌절당하고 있다. 이번에도 전망은 어둡다.

“무엇인가 바뀔 것인가? 대답은 노우다”라는 자문자답으로 시작되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스티브 이스라엘 민주당 하원의원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2012년 26명 아이들과 교사들의 떼죽음을 보며, 오바마 대통령의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며 난 최소한 이번엔 신원조회 확대와 정신질환자 총기구입 규제는 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었다. 그러나 동료의원들이 아이들의 살 권리가 아닌, 총기소유주의 권리에 대한 논쟁으로 사안을 끌어가는 것을 들으며 나의 확신은 사라졌다. 솔직한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의원 전용 엘리베이터 안에서 난 그들이 총기규제를 지지하면 자신들의 NRA(전미총기협회) 점수가 떨어져 다음 선거에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정치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미국과 그다지 동떨어지지 않은 영국과 호주에선 대형 난사사건 발생 후 강력한 총기규제가 입법화되었고 그 결과로 총기범죄 면에서는 미국보다 훨씬 안전한 나라가 되었다. 영국민이 총에 맞아 사망할 확률은 미국민보다 30배나 낮다. 호주에선 강력한 규제법 시행이후 대형 난사사건이 단 1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미국이 최소한의 규제법조차 통과시키지 못하는 가장 큰 책임은 공화당 의원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막대한 돈과 엄청난 회원과 튼튼한 풀뿌리 조직을 가진 NRA의 영향력 앞에 굴복한 공화당 의회는 무책임한 현상유지를 넘어 대형난사 범행 계획을 ‘더 어렵게’가 아닌, ‘더 쉽게’ 만드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국민의 안전보다 재선 확보에 급급한 정치인만 탓할 것은 아니다. 그런 그들을 의회로 보내 ‘민의’를 대변케 한 것은 결국 미국의 유권자들이다.

영국과 호주가 강력한 총기규제법을 입법화 시키는 데엔 1996년 각각 한 차례씩 대형 참극을 겪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해 영국의 초등학교에선 샌디훅보다 적게 16명의 아이들이 숨졌고, 호주의 관광지에서도 라스베가스보다 훨씬 적게 35명이 사망했다.

도대체 미국에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희생되어야 총기에 집착하는 의회와 표밭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인가.

<박록 주필>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