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망신스런 삼성의 위기

2017-08-30 (수) 이철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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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젊은시절 TBC 방송과 중앙일보의 이사를 지낼 때의 일이다. 나는 기자 몇명과 이 이사와 점심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삼성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라고 해서 내가 이렇게 물어봤다. “삼성은 재벌이라 수많은 정치인이 (돈 달라고) 손을 내밀텐데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하고 있습니까”

그랬더니 이건희 이사가 대답하기를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버님(이병철)의 뚜렷한 신념이 있으십니다. 정치인은 너무 가까이 하지도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말라는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삼성은 무한하고 정치인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권력 잡은 정치인과 너무 친하다가 정권이 바뀌는 날에는 삼성의 생사가 좌우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상하게 표현한 셈이다. 이병철 회장의 이같은 방침 때문인지 삼성은 TK가 성장배경인데도 박정희 시절 경상도세를 업고 날뛰지 않았다.

삼성의 경영철학은 무엇인가. 사람이다. 인재양성이다. 이병철 회장은 오너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시스템에 의존하는 위임경영체제를 어떻게 개발하느냐에 삼성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인재를 키워 그를 믿고 일을 위임하면 잘 굴러가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이병철 회장의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 - 믿지못할 사람은 쓰지말고 한번 쓰기로 결정했으면 믿고 맡기라는 경영원칙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1982년 보스턴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서 행한 연설이 그의 경영철학을 대변한다. “삼성은 인재의 보고라는 말을 세간에서 자주하는데 나에게 있어서 이 이상 즐거운 일이 없습니다.”

삼성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사원공개 채용제도와 사원연수제를 실시한 회사다. ‘삼성사원’이라는 단어는 ‘일류사원’이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쓰여졌다. 이건희 회장은 “한국의 기업은 일류인데 정치는 4류”라고 말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밉보인 적도 있다.

그런데 초일류를 자칭하는 삼성이 4류의 한국정치 덫에 걸려 지금 몸부림치고 있는 우스꽝스런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본질은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밀접한 유착”이라고 밝혔다. 이병철 회장이 그처럼 강조해온 정치권력과의 ‘불가근, 불가원 원칙’을 스스로 무너트린 것이다. 미르, K스포츠재단 출연금은 뇌물로 인정받지 않았는데 최순실의 딸 정유라를 지원해준 89억원이 뇌물죄로 걸린 것이다. 삼성이 최순실의 장난에 말려들어 이재용 부회장이 옥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코미디에 가까운 비극이다. 사원교육을 가장 중요시하는 삼성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지도부의 체면이 말씀이 아닌 꼴이 되어 버렸다.

이재용 부회장은 아버지 이건희 회장에 비해 고생하지 않고 너무 쉽게 후계자로 부상했다. 이병철, 이건희 회장은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이재용 부회장은 그게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정상에 올랐다. 게다가 회장이 큰 방향을 결정하면 나머지 일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겨지는 전통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성격이 섬세해 사업방향을 일일이 정하고 임직원들의 식탁 예절과 휴대폰 매너까지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순실과 정유라 지원을 잘 몰랐다는 것은 그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 이야기다.

처칠의 아들이 처칠처럼 되기는 힘들고 잭 니콜러스 아들이라 해서 잭 니콜러스처럼 골프 잘 치라는 법은 없다. 지금 삼성, 롯데, SK 등이 겪고 있는 진통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미국처럼 오너 제왕시대는 가고 능력있는 전문경영인 시대가 한국 재벌회사에게도 열려야 한다.

<이철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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