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69) 제32대 대통령 Franklin Delano Roosevelt⑧

2017-08-11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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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DR 은 친노조 대통령이었다. NRA 법에 규정되어 있었던 노동보호 조항이 대법원의 NRA 법의 위헌판결로 무효가 되자 1935년 7월에 FDR 은 New York 의 Robert Wagner 연방상원의원이 주장해 오던 새 노동보호법인 National Labor Relations Act 가 제정되도록 하여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권을 보장하고 노사간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하여 NLRB (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 를 설립하여 노사분규를 조정하도록 하였다. 여러가지의 노동권을 보장해준 이 법이 1937년에 연방대법원에서 합헌이라고 판결되자 노동자들은 이법을 노동자의 “권리장전” 이라고 불렀다.

1935년쯤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대기업들과 부자들은 FDR 의 New Deal 에 반대의 입장을 표시하고 있었으나 연장된 100일간의 국회의 회기가 끝나던 1935년 8월쯤에 이르러서 FDR 은 이제 거의 모든 New Deal 정책과 개혁의 제도를 세워놓은 셈이라고 일단 한숨을 돌려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산넘어 또 산이 있음을 곧 알게 된다. FDR 의 New Deal 정책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보수적인 연방대법원과 일련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서 미국의 국정운영의 척추가 되는 “삼권분립” 제도를 간략하게 짚어보기로 하자. 국가의 권력을 입법, 행정, 사법으로 분활하여 놓았기 때문에 “3권”이 “분립”된것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국정이 운영되고 있는것을 보면 “견제와 균형” (cheks and balances) 라는 통치원칙이 동시에 같은 비중으로 적용되고 있어서 3부간에 엄청난 “월권”과 “견제”가 작동하여 어느 1부가 국가권력을 독점할수 없도록 되어있는 얼키고 설킨 오묘한 제도로써 자칫 손에서 잘못 떨어트리면 쉽게 산산조각이 나버릴수도 있는 수정으로 만든 보물과 같은 것이다.


지난 250여년간 한번도 바위위에 떨어졌던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이 보물의 임시관리자는 항상 국민들의 매서운 감시하에 조심을 하리라고 생각된다. 입법권과 예산수립과 감사의 권한은 국회가 가지고 있지만 예산의 집행은 행정부가 하고 대통령은 “법”에 못지않는 행정명령권을 가지며 대법원은 국회가 아주 힘들게 만들어 놓은 “법”을 아홉명의 연방대법관들이 심의한 끝에 방망이 세 번을 두드린 후에 “위헌이오!” 라고 판결해 버리면 그 법은 없어지고 대통령의 행정명령도 대법원이 “위헌”이면 취소 시킬 수 있다.

연방대법관은 대통령에 의해서 후보자로 지명된후 상원의 인준을 받아야 종신직 (현재에는) 인 대법관이 된다. 대법관은 탄핵을 받지 않는한 현재로는 연령제한없이 사망할때까지 근속할수 있다. 대법관의 신분보장과 독립을 위해서 만들어진 좋은 제도 인데 너무 늙어서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어 보일때 까지 버티고 앉아 있는 대법관들도 자주 있어서 가끔 문제가 심각해지기도 한다. 대법관들은 국회의 “입법취지”를 분석해서 법률을 해석하는 것이 임무이지만 그들이 연구실에서 “과학실험”으로 물질을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경험과 머리”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법원의 판결은 더러 문제가 되는 수도 있다.
대법관 9명이 10년, 20년전에 임명된후 그대로 버티고 앉아 있을 경우에 진보적인 대통령은 법해석과 집행에 대법원과 충돌을 경험하기가 쉽다. 그래서 대통령 으로서의 자기의 발자취를 오래 남기고 싶어하는 거의 모든 대통령들은 연방대법관 지명을 가장 중요한 인사권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처럼 헌법재판소가 별도로 없는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탄핵재판때 대법원장이 탄핵재판소인 상원에서 재판장으로서 사회를 보며 모든 법률은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위헌여부를 판결할 권한이 있으며 대법원의 위헌판결은 최종적인 것이다. 그러나 가끔 예상치 않은 변수들도 작용한다. 임기중에 대통령의 “성분”이 변하는것을 보고 미국사람들은 “grow on the job” 이라고 말하는데 실무경험으로 대통령이 완숙해져간다 라고 해석될수도 있는 표현이다.

대법관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던적이 여러 번 있었다. Eisenhower 대통령은 보수주의자라고 생각되어 California 주지사를 지낸 Earl Warren 을 대법원장에 지명 하였는데 그는 재임중 근래에 가장 진보적인 대법원장이 되었다. 불과 얼마전에 은퇴한 Sandra Day O’Connor 대법관은 공화당의 강경보수파 Barry Goldwater 상원의원 밑에서 일한적도 있던 그녀의 보수성 때문에 Reagan 대통령이 대법관으로 지명하였으나 재임중 성분이 완전히 바뀌어서 퇴임전 약 10여년이상 가장 진보적인 대법관으로 일해 왔었다.

미국역사를 보면 대법원이 대통령보다 진보적이었던 경우가 더 많았고 대법원의 판례로서 개혁이 이루어진 경험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FDR 은 그와 같은 행운스러운 정치운명을 타고 나지 못하였다. 그의 진보적인 정책과 개혁들의 발목을 대법원이 연속해서 잡았다.
1936년에 대법원은 FDR 이 농산물들의 과잉생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농토를 휴유하는 농민들에게 현금보상을 해주도록했던 AAA 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대법원은 현금보상의 재원이었던 “농산물가공세”가 위헌이며 농산물생산 억제가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이었다. FDR 은 농산물 과잉생산 방지를 위해서 또 “토지보호법” (Soil Conservation and Adjustment Act) 를 입법하여 농토를 보호해주는 대체곡물을 경작할 경우에 현금보상을 해주도록 하여 과잉생산을 방지 할수밖에 없었다. 또한 대법원은 증권거래를 규제하기 위해 설립된 SEC 의 권한을 제한하였으며 석탄광산들을 육성하기 위한 특별법도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대법원은 1923년에 연방정부가 제정한 Washington, D.C. 의 여성근로자들의
최저임금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한적이 있었었는데 1936년에 New York 주가 여성최저 임금법을 입법하자 고용주와 여성노동자가 맺은 계약을 주정부가 무효화 시킬 권한이 없다고 위헌판결을 내렸다. 다시 말하자면 연방정부이던 주정부이던 간에 최저임금법을 제정할 권한이 없다는 판례이었다.
고심 끝에 FDR 은 1936년 6월에 Government Contracts Act 가 입법되도록하여 노동부장관이 연방정부와 계약을 맺는 모든 기업체들은 연방정부가 정하는 최저임금을 지불해야하고 근무시간의 상한선을 넘지 않아야 하고 16세 이하의 소년이나 18세 이하의 소녀를 고용하지 않도록 요구하도록하여 많은 기업체들의 노동조건을 향상시켰는데 결국은 다른 기업체들도 정부의 규정을 자진해서 따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FDR 은 1936년에 총선거를 당면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New Deal 정책들이 좋은 성과를 내었다고 판단하고 대통령에 재출마하기로 하였다. 1936년 6월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산업생산 수준은 호황기였던 1923-25 수준에 육박하였으며 공장 고용이 증대 되었었고 농촌의 임금수준도 올라갔으며 한때 천만이 넘었던 실직자들이 7백만 명으로 줄어 들었으며 국가 총소득도 1933년에 비해서 60% 가 증가하였다. 대공황을 아직도 벗어나지는 못하였었지만 FDR 은 Theodore Roosevelt 이후에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이되어 있었다.

1936년의 총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공천된다는것은 떨어질것이 확실한 복권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었다. Kansas 주지사 Alf Landon 이 공화당후보로 공천되었는데 그는 진보성향의 정치가이었다. 공화당의 보수파들은 New Deal 정책을 반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Landon 은 비교적 진보적인 정강을 내놓았다. Landon 은 노인지원, 실직보험, 노동자 권익보호, 최저임금, 장시간 노동금지, 청소년과 여성의 노동보호, 농산물 과잉생산금지와 농토보존등 FDR 의 New Deal 정책들을 정면으로 반대하기가 어려웠으리라고 생각되며 정부의 역활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도 많이 변해 있었던 것이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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