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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61)Franklin & Eleanor Roosevelt②

2017-06-16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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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여인은 FDR 의 개인 비서이었던 Marguerite (“Missy”) LeHand 이었다. 마지막 여인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한동안 백악관에 머물고 있던 스웨덴의 Martha 공주이었 었다. 직원들은 그녀를 “The President’s Girlfriend” 라고 불렀고 두 사람의 염문이 신문에 gossip 으로 나온 적도 있었다.

Eleanor Roosevelt
한 여인이 아주 젊은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큰 야망이 있고 정치적 역량이 차고 넘쳐서 출세가도를 승승장구 하다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 되고 자기 자신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First Lady 로서 만이 아니고 여성 Activist 로써 남편 못지않은 명성을 올리다가 장수까지 하였다면 아마도 세상사람들은 그녀가 “성공한 사람” 이었다고 부러워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설혹 그녀가 부부간의 육체적교합은 즐거운 것이라기 보다는 의무적인 것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을 지라도 자녀가 여섯 명이나 되었다면 세상 사람들은 부부관계가 친밀했던 증거 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떤 여인이 부유하고 명문가인 집에 삼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여덟
살 에 사망하고 alcohol 중독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던 아버지 마저 열 살에 사망하여 엄한 외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성장했다면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오빠도 alcohol 중독으로, Harvard 대학교를 졸업한 남동생도 오래들 살지 못하고 사망 했다면 더 이상 불행할 수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버지가 집안의 하녀를 손대어서 출생한 이복 여동생도 하나 있었다.


작은 아버지가 위대한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이었더라도 역시 불행한 사람이었음에는 분명하다. 더구나 그여인의 남편이 후일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큰 역사적 업적을 남겼을지라도 거의 평생동안 자기 이외에 딴 여자들에게 마음을 두고 살았었다면 그녀는 아주 “박복한” 사람이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Eleanor Roosevelt 는 위에 말한 모든 것을 다 경험한 사람이었다. 보통사람이었다면 계속된 박복한 팔자에 좌절되기 쉬웠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Eleanor 는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고 승화해서 평생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대변했던 미국사람들의 성숙하고 포근한 어머니, 아주머니, 할머니 노릇을 충실하게 해낸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아주 어른 스러워서 어머니가 “Granny” 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녀는 반인종 차별주의자이었으며 흑인과 미국원주민들의 옹호를 위해서 노력했었다고 한다.

그녀는 흑인여성 지도자들을 백악관에 초청해서 차를 같이 마셨으며 흑인학교나 흑인을 위한 사업현장을 찾아가 사진이 신문에 자주 공개되도록 하여 흑인들을 격려하였다. 그녀는15세 때에 London 의 숙녀학교에 유학하고 있다가 New York Society 에 데뷰 해야한다는 외할머니의 명령에 따라 17세에 학교 교육을 끝내고 뉴욕으로 돌아와 데뷔도 하고 학교 교사등을 하고 지나던 중 FDR 을 만나게 되었고 21세에 결혼을 했다. 그녀는 자신을 “ugly duckling” 이라고 자평했다는데 실은 훤칠한 키에 품위 있눈 여성이었다.

그녀가 개성이 뚜렷한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녀를 아버지 대신에 결혼식장에 인도해주고 결혼증서에 보호자로 서명해준 작은아버지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아들이자 사촌인 Theodore Roosevelt, Jr. 가 1924년에 뉴욕주지사에 공화당후보로 출마하였는데 그녀는 민주당후보 Al Smith 를 지지하여 당선시켰다.

남편 FDR 이 민주당 중견정치인 이었던 까닭이었겠지만 이때의 일 때문에 Eleanor 는 Teddy 쪽 Roosevelt 와 고모 등과도 오랫동안 불화가 있었다. 그러나 Al Smith 지사의 정치 기반이었던 민주당의 Tammany Hall 이 뉴욕시의 부정 사건들에 많이 개입되는 것을 알고는 Tammany Hall 세력약화에 앞장섰고 결국 1928년 선거에서 FDR 은 뉴욕주지사로 당선 되었다 .

Eleanor 는 시어머니복도 타고나지 못한 여인이었다. 항상 살림에 간섭하였었던 과부가 된 시어머니 Sara Roosevelt 는 Manhattan 의 지금 Hunter College가 있는 근처에 3층짜리 연립주택을 지어서 FDR 내외와 옆집에서 살았는데 두 집 사이에 매 층마다 sliding door 를 만들어 놓고 수시로 왕래하였으며 FDR 자녀들의 교육에도 항상 간섭하며 손자녀들에게 “너희들의 엄마는 너희들을 낳아주었을 뿐이고 너희들 교육은 할머니가 하는것 이란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무렵 Eleanor 는 “내 것은 아무 것도 없구나!” 라고 한탄했었다는 말도 있다.


Eleanor 는 걷지 못하는 남편 대신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고 국민들의 얘기를 들었다. 더러는 연설에서 FDR 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여행은 대부분 기차나 자동차로 하였을 당시에 한해에 4만4천 마일을 왕래 했다고 한다. Hoover 대통령 임기의 마지막해인 1932년에 제대군인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농성시위를 하다가 진압군의 발포로 수명의 사상자가 났던 일이 있었는데 1933년에 또 다시 제대군인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군부대 영내에서 농성하였다.

Eleanor 는 농성장에 찾아가서 제대군인들과 함께 군가를 합창하며 그들의 요구사항들을 경청하였으며 그 요구들을 FDR 에게 전달하였다. 그녀는 요즈음식의 여성동등권 주장자는 아니었지만 여성의 인권과 신분의 향상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저명한 여성사회사업가로써 FDR 이 뉴욕주의 산업국장이었던 Francis Perkins 가 최초의 여성 연방노동부장관 으로 임명되도록 하였다.

실제로 FDR 은 국무회의를 하면서 반농담조로 “My Mrs. Told me …” 라고 말해가면서 Eleanor 에게서 들은 국민의 소리를 전달했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기자회견을 정기적으로 하였으며 여러가지의 언론기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였고 신문과 잡지에 column 을 쓰기도 하였다.

FDR 의 염문때문에 사이가 나빠져 Eleanor 는 뉴욕에, FDR 은 백악관에서 거주하는 경우가 많아서 가끔 Eleanor 가 백악관에서 유숙하고 나면 그다음날 gossip 난에 “Eleanor 가 어젯밤에 백악관에서 잠을 잤다” 라고 농담섞인 기사가 나곤 했었다.

Franklin 과 Eleanor 는 한때 심각하게 이혼할 것을 고려했으나 시어머니 Sara 가 적극반대하였다고 하며 만일 이혼을 하면 FDR 에게 한푼의 유산도 남겨주지 않을 것이 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Eleanor 자신도 염문의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FDR 이 주지사가 된 후에 44세이었던 Eleanor 에게 32세의 뉴욕주 경찰 경사가 경호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가 그녀를 항상 밀착해서 경호하고 테니스 등 운동도 가르켜주자 단순한 경호관만이 아니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외에도 그녀는 어느 유명한 여기자, 여류비행사 Amelia Earhart, 기타의 저명한 Lesbian 여성들과 친분이 깊었고 강한 애정을 표현한 교신들이 후일 발견되어서 그녀가 Lesbian 이었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벌판에 홀로 우뚝 선 거목 같았던 걸출여성이었던 까닭에 온갖 소문, 풍문에 시달렸을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FDR 이 서거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한 Truman 은 Eleanor 를 초대 UN총회 미국대표로 임명하여 그녀는 7년간 봉사하였으며 초대 UN인권보호 위원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세계인권선언문 초안작성에 크게 기여 하였었다. Truman 대통령은 Eleanor 의 인권보호에 대한 업적을 치하 하면서 그녀를 “First Lady of the World” 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Kennedy 대통령은 그녀를 여성지위 향상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녀는 1962년에 교통사고가 나서 치료를 받던 중 폐결핵이 합병하여 78세를 일기로 장편소설 같았던 일생을 마감하였다. 1999년의 Gallup 조사에서 그녀는 20세기에 가장 존경받는 10 여성 중 아홉 번째로 뽑혔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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