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명문가 이야기

2017-05-2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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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貞明)공주는 조선조 16대 왕 인조(仁祖)의 고모가 된다. 이 정명공주의 집에서 큰 잔치가 있었다. 고관대작의 부인들은 모두 몰려들었다. 그 차림새의 호화스러움은 백화가 난만한 모습이었다.

그런 가운데 보잘 것 없는 가마가 도착했다. 한 노파가 내렸다. 차림새가 평범하다 못해 초라해 보였다. 성장한 고관대작의 부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저런 사람이 이런 자리에 왔나 하는 비웃음과 함께.

정작 정명공주는 황망히 내려가 그 노파를 정중히 맞이하고 융숭한 대접을 했다. 얼마 후 노파가 서둘러 일어서자 공주는 문까지 나가 전송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있었다.


노파는 당시 재상인 이정귀의 부인이었다. 남편은 재상이고 맏아들은 이조판서, 둘째 아들은 승지였다. 그러니까 남편은 국무총리이고, 맏아들은 장관, 둘째 아들은 청와대 수석 비서관 격이었던 것. 그 스스로도 예조판서의 딸이었으나 이 노부인은 검소하기만 했었던 것이다.

‘로마사는 바로 명문가(名文家)의 역사다’-. 로마인 이야기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말이다.

고대 로마인에게는 세 개의 이름이 있었다. 개인의 이름, 씨족을 나타내는 이름, 그리고 가문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고대 로마사는 어찌 보면 세 번째인 ‘가문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점철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한 예가 ‘카이사르’ 가문이다. 카이사르라는 가문의 이름은 기원전 7세기 때부터 로마역사에 등장한다. 원래 피정복자인 아발롱 부족의 유력 가문으로 로마 귀족으로 받아들여졌고 원로원 의석을 제공받았다.

카이사르 가문을 전 세계적으로 알린 인물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기원전 44년 그는 암살되지만 제정이 성립되면서 황제가 되는 사람에게는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주어 졌다.

인물이 차고 넘쳤다. 융성기의 로마가 그랬다. 이는 다른 말이 아니다. 유력한 인재를 배출한 명문가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이야기다.

개방성과 관용이라는 로마정신에 투철했다. 거기다가 노블리스 오블리제(귀족의 책무)를 몸소 실천했다. 로마의 명문가들의 특징이다. 로마의 명문가들은 그러니까 공동체 정신을 떠받치는 기둥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로마가 쇠퇴기로 접어들면서 명문가들도 사라진다.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발탁된 장하성 고려대 교수의 집안이 현대판 한국의 명문가로 알려져 화제다. DJ 정부 이후 장관급만 3명을 배출했다는 보도다.

장관에, 세계적인 학자에 그 집안이 배출한 인재의 면면은 화려하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정작 눈길을 끄는 부문은 선대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한 가문이라는 점이다.

명문가로서 가문의 명예와 특권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짜 명문가는 언제나 대가를 치러야 하며 결코 현장을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한국형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모범을 보인 가문이라고 할까. 모처럼 접하는 훈훈한 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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