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버지를 욕되게 한 딸

2017-05-18 (목) 최재경/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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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칠판 옆에는 국민교육헌장이 걸려있었다. 국민학생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무조건 외어야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모두 외울 때까지 방과 후 교실청소를 해야 했다. 자꾸 외우다보니 가슴 벅찬 단어들이 하나 둘 머릿속에 남았다. “민족중흥” “역사적 사명” “자주독립” “인류공영”…

몇 년 후, 헌법이 바뀌고 유신정부가 들어섰다. 유정회, 통일주체국민회의, 비상계엄과 긴급조치. 반대데모가 끊이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데모에 가담하지 않았다. 먹고 사는 것도 급했고, 바꿔봤자 더 흉악한 권력자가 나타날까 걱정이었다. 정치에는 무관심한척, 하루하루 생활이 나아지는 것에 만족했다.

아주 가끔 신문, 방송이 재벌정책을 비난할 때에도 국민들은 무관심한 척 했다. 내 세금으로 재벌이 공장을 세우더라도, 내 임금을 업주가 쥐어짜더라도, 국산품을 애용하느라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국민들은 불평을 입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내일이 오늘보다 좋아진다면 무엇이든 참을 수 있었다.


국민 각자가 이를 악물고 노력했고, 대한민국은 세계가 놀랄 정도의 번영을 이룬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지 30여년 만에 딸이 대통령이 되었고, 국민들은 반성과 화해를 통한 국가의 업그레이드를 기대했다. 아버지가 저지른 독재와 탄압을 딸이 사과하면 국민은 아버지가 닦아놓은 경제의 기틀을 칭찬하고, 재벌이 과거의 착취를 반성하면 국민은 재벌의 자본을 구심점으로 세계 거대기업에 경쟁하는 국민기업을 만들 수도 있었다. 발전적으로 과거를 정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 딸이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아버지는 확고한 국가적 비전을 갖고 있는 지도자였다. 국민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라는 것을, 자본축적과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업이 국가의 미래라는 것을 실천에 옮긴 지도자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마냥 그를 칭송할 수 없다. 방법과 과정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잘못된 방법으로 권력을 잡는 데 대한 역사적 교훈을 후세에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반년동안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있었다. 답답하고도 긴 시간이었다. 마침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이제 대한민국은 과거를 정리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맞았다. 많은 파괴가 있었기에, 새 정부는 화합과 발전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소모적 이념논쟁의 빌미를 제공하지 말기를 바란다. 일주일 남짓 새 대통령이 보여준 친근한 모습에 안도를 느낀다. 오바마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개방된 모습이 계속되길 바란다.

딸은 아버지를 최고로 칭송받는 전임자로 만들고 싶어 했다. 어리석은 딸은 결국 아버지를 죽였다.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패망의 길을 자초했다. 앞으로 5년 대한민국의 보수는 새롭게 태어나야한다. 보수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보수의 가장 큰 덕목은 도덕성이다. 도덕성이 결여되었던 과거의 보수는 역사 속에 묻어버려야 한다. 새로운 보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고, 법치를 운용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공산주의만 아니라면 독재도 괜찮다는 나치식 국가관을 버려야 한다. 기득권을 지키는 수구와 차별해야 한다.

<최재경/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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