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무모한 행동

2017-05-17 (수) 12:00:00 김영란(북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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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한국에 나갔을 때 지하철을 탔다. 가는 도중 술 취한 사람 둘이 탔는데 쳐다본다고 시비가 생겼다. 밀폐된 공간에서 관중을 의식한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는 만큼 내 가슴도 쿵쾅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눈을 돌렸거나 전화기에 고정시키고 있다. 체면상 폭력을 쓸 수밖에 없는 공포 분위기가 절정에 이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그중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저씨가 참으세요”라고 사정을 하면서 그 사람을 다른 칸 쪽으로 밀고 갔다.

조금 전 기세로 치자면 뭔 일이 날 것 같았지만 둘 다 소리만 질러 안도의 숨을 쉬게 했고, 뭔가 기대하던 사람들에게는 싱거운 결말이 됐다. 다음 날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을 줄 알고 무용담을 들려줬다가 핀잔만 들었다. 웬 오지랖이냐? 무슨 일을 당하려고 그랬느냐? 왜 하필 너냐? 등등, 무모하다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미국 프리웨이에서 사고가 나면 뒤따르던 ‘하필이면 그 차주인’이 증인이 되려고 멈추는 것을 몇 번 목격했다. 나라면 결코 하지 않을 그런 모습을 보면 지하철에서의 일이 떠오르고, 내가 수수께끼 같은 행동은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공공의 이익도 되지 않았냐며 홀로 정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들이 싸우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고, 누군가 말려야 할 것 같았고, 그들이 폭력을 쓰면 두 사람은 아플 것이고, 나는 물론 지하철 안 사람들 모두 스트레스를 받고 분노, 절망, 고통의 우울한 기억으로 오래 남을 거라고.


그때 이후 세월은 꽤 흘렀다. 한국에서 지하철을 타보면 사람들은 전화기에 매달려, 앞에 노인이 무거운 것을 들고 서있어도 모르쇠로 일관하니 그야말로 집단 이기주의자들 같다. 흔히 길가에서 다투고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도 많은데, 요즘은 묻지마 폭행까지 이어진다니 현대인의 정신적 불안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감정조절은 못했지만 누군가 말려주길 기다렸다는 듯 스스로 밀려가던 등, 고래고래 소리는 쳤지만 뒤쫓지 못 하는 걸음이 바로 현대인 뒷편의 두려움, 소외감이 아닐까?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통제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 또한 고국의 현실을 인식하고 친구들 조언을 새기며, 앞으로는 생각보다 마음이 앞서는 무모한 행동은 자제해야겠다.

<김영란(북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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