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꽃신 신고 꽃길로

2017-05-11 (목) 12:00:00 그레이스 홍(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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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키가 작은 편이다. 대학생이 되자 작은 키를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하이힐을 선택했다. 처음엔 발바닥에 가해지는 고통을 감내하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이힐을 신고도 만원버스가 오면 뛰어가서 가볍게 올라 탔다. 불편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척 그렇게 하이힐에 익숙해졌다. 결혼해서도 외출할 때면 굽이 있는 구두를 애용했다.

나이 40이 지나고 어느날부터인가 구두를 신기만 하면 발바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으로 병원을 찾았다. 의사 선생님께서 한마디 하셨다. “이제 하이힐에서 내려오시지요.”10여 년 전 미국에 처음 이민 와서 유난히 신발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아울렛 매장에 쇼핑을 갔다. 고급스런 명품 구두들이 자태를 뽐내며 즐비했다. 싼 가격이 구매의욕을 끌어 올렸다.

내 아픈 발은 구두를 거부했으나, 뇌에서는 가성비를 내세웠고, 마음에서는 놓고 그냥 가면 눈앞에 아롱거려서 평생 후회할 거라 했다. 마음의 소리를 들은 손은 지갑을 열고 두 켤레를 샀다.


미국 도착 후 한달의 꿈 같은 휴가가 끝나고 가게를 인수받아 일을 시작했을 때 난 옷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까만 운동화를 신고 일을 해야 했다. 새 구두들은 신발장 위에 고이 모셔 놓았다. 구두 케이스 위에 예쁜 구두가 얌전히 올려져 있었고 출퇴근하면서 한번씩 눈길을 주었다.

일을 마치고 현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구두들에게 말을 걸었다. ‘길가의 꽃나무는 바람따라 꽃잎을 날리는데 하얀 꽃잎이 눈이 오는 듯 너무나 아름다워. 호숫가에는 노란 수선화가 세상이 제집인 양 사방천지에 피었더라.

봄 햇살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 잔치는 즐겨 줘야지 창조주에 대한 예의인 것 같은데. 언제 왔다 가는지 모를 이 봄이 어물쩍 가기 전에 널 사뿐히 신고 꽃길만 걷고 싶어. 그런데 미안해. 미국이 이렇게 날마다 일을 해야 먹고 사는지 미처 몰랐어. 미안해.’십여년 전 그 해 봄은, 날마다 까만 운동화를 신고 내가 견딜 수 있는 최대한 열심히 일만 했었다. 하이힐이 주는 압박을 참으며 씩씩하게 잘 걸었듯이.

<그레이스 홍(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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