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52)제29대 Warren G. Harding 대통령과 각료들의 부패③

2017-04-14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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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캐나다 농산물의 저가 경쟁으로부터 미국농민들을 보호하기위해서, 또 공산품
제조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올린 수입관세 인상은 곧 무역의 감소로 이어졌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대미국 수출이 어렵게 되자 미국의 대외수출도 감소하였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미국 수출품에 대한 보복관세를 시작하자 국제무역이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전 세계가 손해를 보게 된 것이다.

전형적인 재벌출신 답게 Mellon 재무장관은 전쟁중에 인상되었던 전시세금세율이 인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투자의 촉진을 위해서는 전시중에 72% 까지 인상되었던 최고 세율이 25% 로 감소되어야하고 , 전시중의 과잉 이익세는 즉시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어떤 국회의원은 감세로 인한 Mellon 장관 한사람의 감세총액이 Nebraska 전 주민의 총감세액보다 더 많다고 비난하였으나 국회는 결국 최고 세율을 50% 로 인하 하였으며 Mellon 장관이 요청하지도 않은 일반국민들의 세율도 인하하였다. 결국 Mellon 은 1924년에 최고 세율을 25% 까지로 인하 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고소득자들의 세금인하와 자본투자 증가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현재까지도 별로 실증된 적이 없다.


부자들의 자본투자를 촉진 시키기 위해 세율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은 지난 몇 십 년간
매 공화당 정권이 주장해 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America First!” 를 외쳐대며 미국의 신고립주의를 제창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수입관세 인상과 고소득자들의 감세를 목표로한 소위 Tax Reform 의 진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Mellon 급으로는 따라가지는 못하더라도 자칭 최고재벌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출신성분도 고려해가며 그의 주장을 생각해 봐야 한다.

국회는 불구제대 군인들에게 상여금을 주는 법을 제정하였으나 Harding 은 친재벌 대통령답게 그 법을 veto 하여 버렸다. 제1차 세계대전중 연합국들이었던 영국, 프랑스, 이태리 등은 미국에서 총 90억 달러를 대부 받았다. 연합국들은 그 돈이 대부분 미국에서 군수물자를 구매하는데 쓰였고 미국의 방위를 위해서도 쓰였으므로 미국은 그 대여금을 탕감해 주어야 한다고 버티었다.

처음에는 연합국들이Versailles 조약에 따라 독일에서 받아내는 전비보상액으로 미국에 빚을 갚기 시작하였다. 전비보상을 부담할 수 없었던 독일은 미국에서 돈을 꾸어다가 연합국에 갚기 시작하였는데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대공황으로 돈을 더 꿀 수 없게 되자 “꾸어서 빚갚기” 미봉책을 더 쓸 수가 없어서 결국은 연합국들의 빚을 미국이 탕감해주게 되었다고 한다. 전시에 진 빚을 미국에 완전히 다 갚은 나라는 핀란드 한 나라 뿐이라고 한다.

위에 적은 업적 정도로만 임기가 끝났으면 Harding 은 평균이하 의 평가로 미국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Arthur Schlesinger 역사학교수는 1948년도에 Harding 을 최하위급 대통령으로 평가한적이 있다. 그러나 취임 후 2년이 되던 때부터 발각되기 시작한 그의 몇 각료들의 사상 유례가 없던 부정부패 사건들은 Harding 을 극복할 수 없는 번민을 하게 하였고 취임후 2년 5개월 되던 때에 그를 병사하게 만들었다.

Harding은 부패의 진상을 파악해 나가면서 “I have no trouble with my enemies. It is my friends who keep me walking the floors at night.” 라고 한탄 하였다고 한다. 1923년에 들어서면서 Harding 은 그의 “Ohio Gang” 들이 저지르고 있는 부정 부패행위에 대한 소문을 듣기 시작하였다. Harding이 잘못 임명한 고급공무원들과 그들의 부패에 대한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대통령취임 후 Harding 은 별로 잘 알지도 못하는 Charles R. Forbes 대령을 “제대군인 원호청” (Veterans Bureau) 청장으로 임명하였다. 원호청은 상이군인들의 치료를 위하여 각지에 원호병원을 운영하며 제대군인 후원을 위한 모든 정책을 집행하는 거대한 부서 이다. Harding 의 재임기간 동안에 각지에 원호병원 (Veterans Hospital) 들이 지어졌다고 한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Forbes 원호청장은 경쟁입찰이 없이 병원건축 계약을 맺었고 병원들의 소비물자를 자기 소유의 회사들이 조달하도록 했었다. Forbes 는 재직 2년 동안에 2억5천만 달러를 남용하거나 횡령했다. 이 부정사건에 대한 귀뜸을 검찰총장이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Harding 은 Forbes 의 국외여행을 허가해 주었고 Forbes 는 유럽에서 청장직을 사직하였다. 상원이 Forbes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자 원호청의 법률고문인 Charles F. Cramer 는 자살하였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되지도 않아서 Daugherty 검찰총장의 친구이자 부하직원 이었던 Jess Smith 가 권력형 영향력을 팔고 다니다가 발각되자 1923년 5월에 또 자살하여 버렸다.


그때까지 발각된 고급공무원들의 부정 부패의 규모만 해도 제18대 Ulysses Grant 대통령 이후에 가장 큰 규모이었다. 이 사건들에 엄청나게 충격을 받은 Harding 대통령은 1923년 6월에 미국서부와 알래스카를 순방하는 여행을 떠났다.

여행중에 Harding 은 동행했던 Hoover 장관 등 여러사람들에게 “친구들에게 이렇게 배신을 당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요?” 라고 반복해서 물었다고 한다. 여행중 Harding 은 폐렴이 발병, 엿새 후인 8월 2일에 심장마비로 샌프란시스코에서 갑자기 57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열차로 Washington 까지 운구되어 장례식을 마치고 고향인 오하이오 주의 Marion 에 운구되어 매장되었는데 연도에 총 900만명의 조문객들이 나왔다고 한다 .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재임기간 동안에 일어난 각료들의 부패상들이 밝혀지기 전 까지는 Harding 은 인기가 높았던 대통령이었었다.

Harding 집안은 남북전쟁 전부터 노예 해방주의자들이었다. Harding 자신도 인종차별 반대주의자이었는데 그의 4대 할머니들 중의 어느 한 사람이 흑인이었다는 소문이 평생 그를 따라다녀 사업을 할 때나 선거운동을 할 적마다 그를 괴롭혔다. 무슨 연유에서 이었던지 2015년에 Harding 의 후손의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 할머니가 흑인이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Harding 은 두 번 오랜기간 동안 혼외정사를 하였다. 다섯살 연상의 여인으로 아들을 데리고 재혼한 부인 Florence 와 결혼을 하였는데 Florence 는 신문사를 경영할 때나 Harding 정계입문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두 번째 정사에서 딸 한명을 두었는데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딸을 위해서 매달 500달러의 양육비를 주었다고 한다.

Harding 이 사망한 후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회임을 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가족들과 딸 Elizabeth A. Blaesing 의 아들 및 손자 간에 친자확인이 계속 문제가 되었던 모양으로 2015년에 유전자 확인결과 Harding 의 딸임이 확인되었다.

Harding 의 사망후 그의 각료들의 부패규모의 진상이 더 밝혀졌다. Forbes 는 2년형을 선고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독일에서 취득한 자산을 관리하던 Thomas W. Miller 는 자산을 밀매하여 Ohio Gang 들과 함께 착복한 것이 발각되어 형무소로 갔다. Doherty 검찰총장도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선고를 받았다.


가장 심각했던 부정사건은 연방정부가 무역과 국방 등을 위한 석유자원으로 1912년부터 보존해 오고 있던 석유매장지 세 곳 중 두 곳을 Fall 국내부장관이 40만 달러 상당의 대출금과 선물들을 받고 민간업체에 lease 해 준 것이었다. 사건이 발각되어 Fall 장관은 1년 징역형을 받았으며 대법원판결로 lease 는 취소되었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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