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쓴 글이라도 몇 해가 지난 후 읽다보면 더 이상 동의하기 힘들어지는 글들이 있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또 그 글이 어떤 방식으로든 생보다 길게 남으리라 소망하는 사람으로서, 읽는 누구나 마음으로 읽히는 영원한 가치에 대해 쓰자는 욕심을 갖게 된다.
물론 힘든 일이다. 더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고자 하는 도전이라면 시대를 읽는 노력으로 어느 정도 성취가 가능하겠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에 대한 논의는 사활을 거는 숙고와 고뇌로도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개인적인 믿음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버리기 힘들다. 행동을 넘어서 삶의 제대로 된 동기와 열정의 모태가 되는 ‘가치’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한 고국의 분열을 목격하고 있다. 마음 한켠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는 이민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토록 명백하고 극명한 분열과 충돌의 모습은 참담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심지어는 목숨을 담보로 싸우는 듯한 모습을 보며, 이들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 가치에 대한 궁금증이 커진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가치의 충돌이 전쟁으로 비화되는 예를 보아왔다. 하버드대 심리학자 조슈아 그린은 자신의 저서 <옳고 그름>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도덕성은 협력을 가능케 하기 위해 진화했다. 그러나 이 결론에는 중요한 제한 조건이 있다”며 “일부 사람들과의 협력, 즉 개인적인 인간관계 안에서만 이뤄지는 협력”의 개념을 소개했다.
그 원인으로 ‘협력’의 개념 역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인간 본능적 테두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내세웠다. 즉, 자신의 이익이나 사상에 반하는 협력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반 본능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가치나 사상의 불일치로부터 말미암은 다툼과 투쟁을 겪을 수밖에 없다.
조슈아 그린은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꿈꾸는 이 책에서 ‘공리주의’를 그 해답의 하나로 지목한다. 즉, 가치 간 상호 모순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고차원의 도덕이 바로 공리주의라고 설명하는데, 공리주의가 추구하는바 대로 궁극적인 ‘행복과 공평성’이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면야 물론 우리가 기댈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과 공평을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개개인의 가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 역시 우리의 무조건적 기대를 만족시킬 순 없다.
그러면 이제 어쩔 수 없이 원론적인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의견의 불일치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이나 입장에서 비롯된 사고를 할 수 밖에 없으며, 이를 나무라거나 비난할 근거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이러한 다양성이 우리 사회의 다이나믹한 집단 역학을 완성하는 것이라면 더욱 불평하기 힘들어진다.
애초에 어떤 사소한 사건이나 의견에도 ‘옳고 그름’을 가를 수 있는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해야하는 우리 사회라면,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이 수많은 불일치를 단순히 듣기 싫은 불협화음으로 치부하는 것이 올바른 해법은 아닐 것이다. 이제 문제는 그 다름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이해하느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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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미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