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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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46 )제28대 Woodrow Wilson 대통령 ⑦

2017-03-03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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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1913-1921)

평화조약에 14 Points 를 반영하기 위해서 연합국 수뇌들을 설득하느라고 Wilson 은 전력하였다. 영국의 David Lloyd George 수상, 불란서의 Georges B. Clemenceau 수상, 이태리의 Vittorio E. Orlando 수상들을 설득해야 했는데 불란서 수상은 “아니 도대체 하나님의 계명도 10개 밖에 되지 않는데 14 Points 라니 웬 조건들이 그리도 많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처음에는 아주 냉소적이었다.

그들은 전쟁 중에 자기의 나라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 지를 회상하고 독일이 다시 재생 할 수 없도록 벌을 주기 원했으며 전승의 포획물로 자국이 최대의 영토, 재물, 권리등을 독일로부터 탈취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Wilson 이 지상의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자기만이 정의로운 생각을 하고 있다고 떠들고 다니는 아니꼬운 위선자로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합의된 Versailles (베르사이유) 평화조약안은 Wilson 이 원했던 만큼 관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삼개국 수뇌들이 원했던 것 만큼 복수심에만 가득찬 것도 아니었다.


각 국은 비밀조약에서 합의된대로 영토를 분할받았으며 독일의 식민지들도 전승국들 에게 분배되는 과정에서 Czechoslovakia, Poland 등의 군소 자주 독립국가가 신생 되었다. 평화조약안 중 가장 매서운 독소조항은 독일이 배상하여야하는 전승국들의 전비보상 조항이었다. 이 독소조항은 실로 유럽의 장래에 암운을 덮은 것이었다.

독일은 항복에 동의하면서 전승국들의 민간인들에게 끼친 파괴는 보상해야 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불란서는 모든 전승국들과 동맹국가들의 총전비를 배상 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총전비 에는 전쟁중에 파괴된 농토, 집, 공장들 뿐만 아니라 총, 탄환, 군인들의 봉급과 제복위에다가 우방국 상이군인들과 가족들의 연금까지 포함 했다. 이 “총전비” 는 액수가 너무 많고 정확히 계산해 낼 수도 없어서 액수가 제출 되지도 않았으며 언제까지 독일이 계속해서 이 총전비를 갚아야 하는 지도 명시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어정쩡한 조약안에다 Wilson 은 그의 이상인 League of Nations 구상안을 포함시켰다. Wilson 은 Versailles 평화조약이 우선에는 허약점들이 많더라도 장차 League of Nations 가 이 조약의 허점들을 다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제 Wilson 은 전승국 수뇌들과의 힘겨운 협상끝에 작성된 Versailles 평화조약안을 미국 상원으로부터 비준을 받아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남아있다.

Wilson 이 미국에 돌아오자 뉴욕항에서는 그가 탄 배를 군함들이 호위해서 들어오는 등 그를 영웅처럼 환호하였다. Wilson 이 Washington 의 Union 정거장에 도착하자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나와서 그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그의 환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평화조약에 반영시킨 14 Points 가 문제가 된 것이었다.

이 글에서 이미 언급했던대로 Wilson 은 정치경력이 부족하고 대인술에 아주 서툰 사람 이었었다. 대부흥회의 유명한 설교자나 학식이 뛰어난 대학교수로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Abraham Lincoln 이나 Theodore Roosevelt 같은 설득력이 있는 정치가로는 아주 부적격인 사람이었다. 그의 League of Nations 을 상원과 국민들에게팔기위해서는 쓴 보약을 어린애에게 먹이려는 어머니같은 참을성과 너그러움이 있어야 하는데 Wilson 에게는 그같은 Salesmanship 이 없었다.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는” Roosevelt 같은 tact 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평화조약회의 참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터 서툴렀다. 조약의 비준은 상원이 3분의2로 가결하여야 하고 당시의 상원은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평화교섭단에 공화당이나 상원의 중진의원들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아마 Wilson은 조약 작성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던 간에 조약만 훌륭하면 그것을 반대할 미국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식의 오만한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역사가들이 있다.


Wilson 은 Versailles 조약안에 포함된 League of Nations 가 그 조약의 핵심이라고 주장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사람들에게는 바로 League of Nations 가 문제이었고 그중 에서도 제10항에 규정된 방위동맹이었다. 동맹국이 침공을 당하면 미국도 자동적으로 참전해야 되도록 규정된 방위조약을 미국인들은 싫어했던 것이다.

상원의 두 중진 공화당 의원들이 이 평화조약안을 반대 하였다. Idaho 주의 William E. Borah 상원의원은 Wilson 처럼 장로교회 목사의 아들로서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자주적 투표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방위동맹를 반대하는 정치인이었다. 또 다른 사람은 Massachusettes 주의 Henry Cabot Lodge 상원의원으로서 상원 외교위원장이었다. 그는 학식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Wilson 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두 중진의원들의 반대로 평화조약안이 상원을 통과할 수 없게 되었다. 만일
Wilson 이 정치적 수완이 능숙한 사람이었다면 이때에 두 상원의원들을 백악관에 초청해서 cocktail 이라도 한잔씩 나누면서 등어리를 좀 따뜻하게 두드려 주었으면 평화조약이 상원을 통과했을런지도 모른다. “오만한 선지자” Wilson 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Wilson 은 한술 더 떠서 또다른 서투른 행동을 한다. 무식한 정치인들이 설득이 않됨으로 자신이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여 상원의원들에게 압력을 가하겠다는 것이었다.
1919년 9월초에 Wilson 은 건강이 좋지 않은 몸으로 전국 8천 마일을 여행하여 29개의 도시를 방문하면서 22일 동안에 40회의 연설을 하였다. 드디어 그는 Colorado 주 Pueblo 에서 졸도하였고 백악관으로 돌아왔으나 심장마비가 일어났다. 그후 8개월 동안 그는 국무위원들도 만날 수가 없었고 모든 외부와의 대화는 부인 Edith Wilson 여사가 전달하여서 이 기간 동안 Wilson 이 무슨 문제들을 어떻게 해서 처리하였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1920년의 대통령선거가 다가오자 Wilson 은 미국민들에게 “세계평화를위한 미국의 도덕적 책임을 져버릴 수가 있습니까?” 라고 호소하면서 그 대통령선거가 자기의 League of Nations 에 대한 국민투표로 생각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때만이라도 상원의원
들과 타협을 하였으면 League of Nations 안이 상원의 인준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민주당 대통령후보였던 Ohio 주의 James M. Cox 가 League of Nations 를 반대 한다는 공화당의 Warren G. Harding 상원의원에게 7백여 만 표의 차로 낙선되었다. 선거중에 Harding 은 “저는 국제협력기구 정도의 설립에 찬성합니다” 라는 애매한 얘기를 얼버무렸다. Wilson 은 끝까지 “작은주들”이 (State) 연합하여 “대북미합중국” (United States of America) 을 건국했던 것처럼 “작은 나라들”이 연합하여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 를 만들어 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결국은실패로 끝난 League of Nations 에 대한 공로로 Wilson 은 일,러 전쟁 종전 공로의 Theodore Roosevelt 에 이어 두 번째 Nobel 평화상을 받았다. 그후에 Jimmy Carter 대통령은 Human Rights 로, Barack Obama 대통령은 International Diplomacy 에 대한 공로로 Nobel 평화상을 받았으며 Al Gore 부통령은 Climate Change 에 대한 공로로 Nobel 평화상 을 받았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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