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45)제28대 Woodrow Wilson 대통령 ⑥

2017-02-24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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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1913-1921)

전쟁으로 장정 4백 만 명이 징병되자 노동인구가 줄어들어 산업체 마다 인력난을 겪었다. 1백여 만 명의 여성들이 전에는 남성들의 전유 직업으로만 여겨지던 용광로화부, assembly line 조립공, 제복을 입은 철도승무원과 시내전차의 차장들로 일하게 되었다.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사회진출 시대가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실은 전쟁후에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자들에게 직장을 양도하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노동인력 부족은 여성들 만으로서 다 메꾸어 질 수가 없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부의 흑인들은 남부를 떠나지 못하고 농업노동자로서 연명하고 있었다. 그들의 노임은 계속 떨어지고 있어서 주거와 식량은 보장 받았던 노예생활 보다 별로 더 나아진것이 없다고 한다. 북부의 노동인구가 모자라자 남부흑인들이 대거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서 전쟁 시작 후 수년 동안에 7만5천 명의 흑인들이 광부로 일하였고 15만 명은 철도 종업원으로 일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전쟁 중에는 노동력의 부족으로 노동임금은 올라가기 시작하였고 정부와 사기업들 간에 인력수요 경쟁이 붙기도 하였다. 기간산업의 종업원 확보를 위하여 연방인력청 (U.S. Employment Service) 이 설립 되었다.


“지금의 세계대전은 노동자의 대전이다” 라고 말하면서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 A.F.L 노동조합) 노조회장 Samuel Gompers 는 노동자들도 적극 협조할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노조파업을 않하기로 약속 하는 대신 노조측도 정부의 보호를 약속 받았다.

1918년 4월에 “국가전시노동위원회”(National war Labor Board) 가 설립되어 노동쟁의를 중재하도록 하여 1,500 여건의 쟁의를 해결하였다. 노조가 중재를 거부했을 경우에는 대통령은 여론몰이로 문제가 해결 되도록 노조에 압력을 가했으며 긴박한 경우에 노조가 끝까지 불응하면 해당 기업체를 정부가 인수하여 문제를 해결 하였다고 한다.

한편 정부는 기업체들이 종업원들의 노조활동을 이유로 종업원들을 해고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전시중임에도 불구하고 가능한한 노동자들의 근무시간을 하루에 8시간 이내로 줄이도록 독려 하였다. 이러한 상호보완적인 노력으로 전시중의 inflation 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20% 이상 인상되었으며 노조회원들이 두 배로 늘어났다.

전시 중에는 인심을 모으고 국민을 단결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민의 나라인 미국에서는 민심의 단결이 항상 쉽지 않다. 국민 대다수는 우선 전쟁을 싫어하였고 수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독일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Irish 계는 영국편이 되기를 거절하였으며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이란 자본가들의 탐욕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중서부의 개혁주의자들은 국내개혁이 우선이라고, 평화주의자들은 전쟁은 “살인”의 동의어로써 어느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민심을 달래서 전비조달을 위한 국채구매자로 까지 전향시키기 위하여 Wilson 은 “공보위원회” (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 를 1917년 5월에 설립하였다. 위원장에 임명된 언론인 George Creel 은 전쟁에 대하여 정부가 알리고 싶은 공보를 매일 발간하였고 전국적으로 대학교수, 작가, 예술가, 연설가 등 수 천 명을 동원하여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십자군으로 전쟁에 참전하고 있다고 홍보하였다.

그들은 독일은 서방세계를 말살하려는 야수나 야만인같은 존재라고 역설하였다. 시민들간에 서로 스파이 의심을 하는 일도 생겼다. 독일에 대한 이와 같은 악선전 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랜동안 여독을 남겼다. 미국사람들은 베토벤이나 바그너의 음악을 듣지 않기 시작하였고 학교에서 독일어 강의를 중단하였으며 “Sauerkraut” 를 “Liberty Cabbage” 로, “Hamburger” 를 “Salisbury Steak” 이라고 비하하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전쟁중인 나라에 안보문제는 없었을까? 한국의 악명높은보안법 수준의 악법은 없었지만 언론통제법들이 생겼고 과격한 행동이나 언행을 단속하는 법들이 생겼다.


1917년부터간첩법(Espionage Act) 으로 언론통제가 가능해졌는데, 국방에 관한 정보를 어느 언론매체에나 보도하면 과중한 벌금형을 줄 수 있게 되었고 미국법 위반을 종용하거나 병역의무나 징집을 피하도록 권고하는 사람은 체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같은 해에 “적국과의 통상금지법” (Trading with the Enemy Act) 법으로 미국에서 발행되는 모든 외국어신문은 전쟁에 관한 모든 기사의 번역문을 우정성 장관에게 제출하도록 하였다. 1918년의 “국가반역법” (Sedition Act) 으로 누구든지 미국정부, 국기, 제복에 대해서 불충한, 상스러운, 욕지거리, 과도한 언사를 쓰는 사람에게 벌금형을 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우정장관은 이런 법들을 위반했다고 생각되는 우편물의 배달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잡다한 법들로 한동안 미국정부의 정책과 행동에 대해서 반기를든 사람들이 곤욕을 치루었다.

1917년에 파업 중이던 동광산 노조원 1,100명이 Arizona 에서 New Mexico 로 잡혀가서 강제수용 되었었고 노조간부들은 형무소에 보내졌다. 수차 대통령에 출마했었던 사회주의자 Eugene V. Debs 도 1918년에 10년형을 받고 수감 되었다가 1920년에 형무소에서 대통령 출마를 하였는데 1921년에 사면되었다.

사실은 전쟁 중에는 이런 법들로 처벌받아야 할 만큼 말썽을 부린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차라리 이런 악법들의 여독이 전쟁 후에도 계속해서 살아 남아서 병균처럼 “간첩잡기소동,” 집단간의 분열, 과잉애국심으로 말썽을 더 부렸다.

윌슨은 세계평화주의자답게 제1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1918년 1월에 국회에 나가서 세계평화를 위한 자신의, 미국의, 세계의 장래 를 위한 정책을 발표하였다. 실로 그정책은 미국의 Founding Fathers 들이 건국이념으로 삼았던 고귀한 이념을 1900년대의 세계의 민주화를 위해 실천해 보자는 것으로서 14개의 원칙을 망라한 것이었다.

윌슨이 주장한 14 Points 중에는 비밀외교를 중지할것, 모든 국제조약은 공개적으로 협상되어 공개적인 문서로서 작성되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다른 나라의 생명과 자유를 집권자들이 헐값에 매도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국제해상자유권” ( Freedom of the Seas) 이 복원되어야 하며 세계의 모든 민족의 자주 자결을 위해서 국경선 들이 재조정 되어야 하며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이룩하기 위해 League of Nations (국제연맹) 이 창설 되어야 한다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14 Points 는 지상의 “민주주의 선언서”로서 전 세계에 감명을 주었다. 이 정책은 미국의 독립선언문이나 노예해방 포고령 만큼 전 세계에 깊은 영향을 준 선언문이 되었다. 1918년 11월에 독일은 항복할 것에 동의하면서 내심 항복조건이 관대할 것이고 윌슨의 이상적인 14 Points 정책이 실천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독일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미국의 평화교섭단을 이끌고 파리로 출발한 윌슨은 재임중 유럽을 방문한 첫 번째 미국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회의 참석목적은 14 Points 를 실천해보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가 “미국의 보호자가 아니라 세계의 설교자가 되겠다는 것이냐?” 라는 맹비난을 미 국민들로부터 받았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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