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44)제28대 Woodrow Wilson 대통령⑤

2017-02-17 (금) 조태환/LI 거주
크게 작게
미국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제경찰 노릇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미국이 국제전쟁에 쉽게 참여하는 지정학적 이유가 있다. 미국은 근현대의 거의 모든 국제전쟁에 참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중에 일본군의 하와이 의 진주만 기습폭격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미국 본토를 점령당해 보거나 본토내에서 전투를 해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천행스러운 일인가! 까닭에 미국사람들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나라 사람들이다. 육군원수가 될 때까지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Eisenhower 대통령은 “군대에 가서 전쟁에 참전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쉽게 전쟁을 하자고들 한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폭격으로 전 도시가 초토화 되고 시민 과반수가 전멸하는 것같은 참상을 직접 경험해 보지않은 미국사람들은 오랜 전투에 시달려온 많은 다른나라 사람들 보다 전쟁의 잔학성을 잘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호전국이 되지 않은 데에는 헌법, 제도, 전통 등의 안전장치가 있는 탓이라고 생각 된다. 미국의 육해공군에는 참모총장 위에 문관인 육해공군장관들이 있으며 이들 각 군 장관 위에 국무위원인 국방장관이 있다. 다른 나라들 보다 군대의 문민통치 전통이 엄격하게 존중되어 오고 있으며 군에 있을 때 인정받은 지도력을 바탕으로 대통령이나 기타의 정치인으로 진출한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군사력을 집적 동원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사례는 단 한번도 없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으로 외교력을 군사력 보다 먼저 쓰려고 노력하는 나라이다. 미국은 1916년 부터 전쟁준비를 서서히 하기 시작하였으나 막상 1917년부터 참전하면서 거의 모든 부면에서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Wilson 은 제반 입법을 통해서 최단 시간 안에 미국의 사회 정치 행정 제도와 관습을 개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아 미국을 전시체제의 나라로 이끌어 갔다.

미국은 인력, 자금, 기계류들과 국민들의 마음까지 총동원해야 했다. 정부가 일반 국민들의 일상생활까지 통제하게 되어서 국민들이 무엇을 얼마 만큼 먹어야 하는 지도 간섭하였고 설탕과 연료까지 배급하였고 여행을 삼가하도록 권고하였으며 정보규제로 국민들의 생각까지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기업의 자유도 통제를 받아서 구입, 생산, 공장위치까지 정부의 규제를 받게 되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준비를 위해서 총력이 동원되었다.

미국의 헌법에 명시된 전통들 중의 하나가 평화시에 거대한 상비군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재정치를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미국사람들은 독재자들이 군대를 국민억압에 악용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병력이 엄청나게 모자랐다. 1917년 5월에 미국국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병역의무법을 통과시켰다. 21세 부터 31세 사이의 모든 남자들은 병역의무자로 등록하도록 하였다. 미국은 남북 전쟁중에 군복무를 의무화했던 적이 있으나 그때는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이 대리복무 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고 군대복무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대리복무를 허용하지 않았고 군복무 반대자들의 폭동도 없었다. 6월 5일까지 천만 명의 장정들이 등록하였고 6월 20일에 추첨으로68만 7천명을 소집하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18세 부터 45세 까지의 남자 2천4백 만명이 등록하였고 3백 만명이 소집 되었다. 추가로 민병대 (지금은 National Guard 라고 불리우는 주방위군) 까지 연방군으로 동원되어 1918년의 전쟁말기에는 총 480만명이 군복무를 하였었다.

여자간호장교들이 육군과 해군에서 복무하였고 해군은 사무실일을 전담하는 여군하사관 1만1천명도 모병하였다. 급작스러운 군대의 증강으로 초기에는 모든 물자가 부족하였으나 불과 몇 개월 이내에 미국의 공장들은 충분한 물자들을 생산해 내었고 소총, 기관총, 탄약들을 충분히 생산해 내었다. 곧 이어 영국과 불란서에게 중장비, 대포, 전차, 비행기 등도 공급하였다.

미 해군은 육군보다는 전쟁준비가 더 잘 되어 있었다. 영불의 선박들에게 막심한 피해를 주던 독일의 잠수함들을 침몰시키기 위하여 속도가 빠른 구축함을 동원하였다. 모자라는 군용선을 보강하기 위하여 독일에서 압수한 배들과 민간선박들이 징발되어 해상수송을 하였다. 잠수함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여객선과 수송선을 해군함정들이 둘러싸는 함대를 구성하여 대서양을 항해하면서 잠수함 공격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정부는 천만톤의 선박들을 주문하였고 여러 곳에 조선장들이 생겼는데 실제로 전쟁에 참전까지한 배는 별로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1921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이 세계 최대의 상선 보유국가가 되었다. 백 여만 명의 미군들과 수 백만 톤의 물자가 영국상선들로 불란서에 수송되었다.

미국의 총전비는 230억 달러이었고 우방국들에게 전쟁중 대여해준 액수가 100억 달러이었다. 이중 105억 달러는 증세로 조달하였고 나머지 액수는 국채를 판매하여 충당 하였다고 한다. 평화시의 경제구조를 신속하게 전시 체제로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1917년12월에 철도산업이 시설부족으로 운영이 힘들어지자 연방정부가 철도회사들을 인수하여 5억 달러을 투자하고 재무장관이 철도를 총괄하였다. 곧 이어 국내수상 수송회사들도 정부가 통제하였으며 전쟁이 끝나기 전에 전신 전화 cable 산업들도 정부의 통제를 받았다.

식품의 원활한 조달을 확보하기 위하여 1917년 5월에 식품성 (Food Administration) 을 신설하고 유능한 engineer Herbert Hoover (후일 대통령) 를 장관에 임명하여 식품, 연료, 비료, 농기구등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하게 하였다. 식품성에서는 1일 밀가루 안 먹기, 고기 안 먹기, 난방 안 하기 등의 절약운동도 하였고 집안에 전쟁밭을 일구어 채소재배 하기를 권장했고 농산물 가격을 높이 책정하여 농산물이 증산되도록 하였다. 농토의 가격이 올라갔고 그동안 채산이 맞지않아 버려졌던 땅들이 새 농토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곡식으로 술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으며 가정용 석탄을 배급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의 결과로 연료와 식품에 여유가 생겼다. 미군과 연합국의 군인과 민간인들까지 의 식품을조달했던 미국의 농산업자들은 유례없는 호황를 맞아 새 농기구들을 장기융자로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식품가의 급격한 하락으로 농산업자들은 심각한 불항을 겪어야 했다.

미국의 경제와 사회구조를 변경해가며 전시체제에 들어가기는 하였으나 모든 것을 총괄하는 효율적인 국가기구가 없어서 1917년 말에 이르러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조화와 불균형이 심해져서 미국은 위기상항을 당면하게 되었다. Wilson 대통령의 요청으로 국회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개편하고 예산을 재량대로 쓸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법을 1918년 5월에 입법하였다.

Wilson 은 이미 1918년 1월 “전시산업통제위원회” (War Industries Board) 를 창설하여 미국 기업들이 무엇을 얼마 만큼 생산할 것이며 정부에 납품하는 가격은 얼마가 되어야 할 것인가 등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도록 하였다. 위원장에는 넓은 안목이 있고 유능한 금융가이었던 Bernard M. Baruch 를 임명하였는데 그는 향후 2년동안 “미국경제의 독재자”처럼 전시경제를 잘 통제해 내었다.

Baruch 는 자동차 생산업자들과의 회의에서 민간용 자동차생산을 줄여 줄 것을 요구했으나 업자들이 선뜻 동의하지 않자 즉석에서 철도회사들에게 전화로 자동차회사들의 수송을 즉각 중지할 것을 명령하고 육군에게 자동차 회사들이 가지고 있는 철강을 즉시 징발하라고 명령하였다. 자동차업자들은 즉각 민간용 자동차 생산을 줄이겠다고 동의하였다고 한다. Baruch 의 재임 동안 미국 경제의 생산량은 늘어났고 낭비는 줄어들었으며 정부에 대한 비난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조태환/LI 거주>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