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39)제28대 Woodrow Wilson 대통령①

2017-01-13 (금)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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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row Wilson 의 아버지 Joseph R. Wilson 은 장로교 목사로서 백인우월주의자이었으며 미국의 장로교가 남북으로 갈라섰을때 남장로교의 창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추후 남장로교의 총회장을 역임했다. 남부인 Virginia주의 Staunton 에서 출생한 Wilson 은 그의 부모로부터 독실하면서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타고 났다. 그는 일찌기 목사가 되지 않기로 결정하였지만 항상 목사처럼 생각하고 말을 하였다.

Wilson 은 Theodore Roosevelt 처럼 학식이 있고 책도 여러 권 저술한 사람이었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Roosevelt 와 정반대되는 사람이었다. Roosevelt 는 해군력 (Sea Power) 에 관한 첫 번째 책을 썼는데 Wilson 은North Carolina 장로교인들의 도덕적 과제에 대한 책을 썼었다. Roosevelt 가 서부의 자연 속에서 훈련않된 말타기같은 심한 거친 육체적 운동을 즐기고 있던 나이에 Wilson 은 Baltimore 에 있는 Johns Hopkins University 에서 정치학박사 공부에 열중하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Wilson 이 의회중심의 정치를 역설한 “Congressional Government” 라는 저서를 썼으면서도 Baltimore 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Washington 에 있는 국회의 의사진행을 한번도 방청해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조용하게 연구생활을 즐기던 성격이었던 듯하다.


Wilson 은 변호사가 되어 1년여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적성에 맞지않아 정치학 공부를 다시 하였는데 Princeton 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한 후 얼마되지 않아 Princeton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총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Princeton 대학교의 학제, 연구방법등 등에 대한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하여 전국적으로는 교육개혁가로써 명성을 얻었지만 Princeton 대학교의 교수들과 동창회로 부터는 강렬한 반발을 받았다.

불화가 아주 심해져서 총장으로 8년여 재직하던 중 그의 개혁을 높이 평가한 민주당의 공천으로 1910년에 New Jersey 주지사에 선출 되었었다. 주지사로 떠나게 된 것을 Princeton 대학교나 본인이나 서로 만족스럽게 생각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

그는 New Jersey 주정부에 실시한 여러 가지 개혁정치를 높게 평가받아 정치경력 이라고는 주지사직 2년 밖에 없었던 사람이 1912년의 민주당 대통령 공천에서 아슬아슬 하게 후보로 공천을 받은 후 공화당의 극심했던 내분 덕택에 1912년의 총선거 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공화당의 내분이 1912년의총선거에 미친 영향은 아주 심각하였다. 민주당은 대통령 뿐만아니라 그해에 선거가 있었던 35개의 주중에서 21개의 주지사를 당선시켰으며 상하양원의 다수당도 되었다.

민주당의 이와같은 승리는 제15대 James Buchanan 대통령 이후에 겨우 두 번째로 18년만에 경험하는 경사로써 민주당이 아주 왕성하게 단결되도록 만들었다. 상하 양원도 같은당 소속의 대통령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도록 mood 가 조성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행운으로 참신한 개혁정치가 이었던 Wilson 대통령은 첫 임기 중 가장 많은 개혁입법을 이루워낸 대통령이 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분위기의 변화는 Wilson 에게는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Wilson 은 큰 대중을 연설로써 감명시키는 특기가 있었으며 활자화 된 글로써 많은 독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있었으나 개인대 개인의 사교술에는 매우 서툴렀다고 한다.

얼굴을 서로 맞대는 만남에서 그는 몹시 어색하거나 거만한 것같은 인상을 주어서 흉금을 터놓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Washington 정치판에 걸맞지 않았던 성품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ilson 은 대통령 첫 임기 동안에 미국경제와 기업에 장기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준 아주 중요한 법률들이 입법되게 하였다.

Wilson 은 시대에 맞추어 부름을 받은 사람같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일하려는 사람 같았다고 한다. 대통령취임 때마다 행해지던 취임축하연회를 일체 금지한 Wilson 은 대통령취임 연설에서 자신은 Washington 을 “정화하고 다시 생각해 보고 재생 시키기 위해서 왔다”고 말하므로써 임기중의 정책방향을 예고하였다.


그는 장래에 무엇이 필요한 것들인가를 잘 설명하는 능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지지를 동원해 내는 타고난 언변이 있었다. 그는 잡다한 난제들을 법률과 규제로써 처리 하였지만 동시에 미국이 양심상 도의적으로 옳고 높은 이상을 지향하는 나라가 되도록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초대 Washington, 2대 Adams 대통령들은 새해 첫 개원을 하는 국회에 직접 출석하여 연두교서를 발표하였다.

3대 Jefferson 대통령 때부터는 대통령이 국회에 직접 출석하지않고 문서로 연두교서를 국회에 보내었다. Wilson 은 초기의 전통을 부활시켜서 국회에 그가 직접 출석하여 연두교서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국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정치철학의 반영이기도 하였지만 대통령의 국회출석은 그의 연두교서에 정치권의 관심이 집중되도록 만들었으며 국민들의 지지를 더 쉽게 받을 수 있는 효과도 있었다.

수입관세법 개정을 위해서 Wilson 은 특별국회를 소집하고 국회에 출석하여 수입관세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Wilson 의 이와같은 정치행보는 즉각적인 효과가 있었다. 하원은 수입관세를 11% 내리기로 하고 줄어드는 세입을 충당하기 위하여 저율의 소득세를 부과하기로 의결하였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부자들의 club 이라는 상원에서는 토론만 계속될뿐 쉽게 통과되지 않았다. Wilson 은 국민들의 여론을 배경으로 이용하여 Washington 정가의 lobbying 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상원은 부유 기업들의 lobbying 이 상원의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자체 조사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드디어 수입관세 개정법은 Wilson 임기 첫 해인 1913년 10월에 법률로 제정되었다. 실로 남북 전쟁이후 처음 실질적이고 대폭적으로 개정된 수입관세법이었다.

Wilson 의 임기가 시작될때까지 미국에는 제대로된 연방정부 차원의 통화량 조절과 은행에 관한 규정이 없었다. 그 결과로1870년대부터 경제규모가 커질 때에는 항상 화페통화량이 모자랐고 경제규모가 줄어들때에는 돈이 남아 돌아갔다. 더군다나 전국의 금융을 통제할 중앙은행 제도도 없었다. 지역별로 경기가 나빠져서 상업이 부진해지면 많은 예금주들은 은행에 가서 자기의 저축액을 전액 현금으로 인출하였다.

일반적으로 은행들은 예금액수의 일부분만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는 탓에 많은 예금자들이 동시에 인출울 요구하면 예금액을 전부 내어 줄 수 없게 된다. 이럴 경우에 예금인출을 원하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오게 되고 은행은 본의 아니게 파산되어 버릴 수가 있었다.

Wilson 은 전국을 12개의 지방 “중앙은행구역”으로 나누어서 지방의 Federal Reserve Banks 가 그지방의 은행들을 보호하고 규제하도록 하고 연방중앙은행격인 Federal Reserve Board (FRB) 가 각 지역의 Federal Reserve Banks 를 통제하도록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연방준비제도,” “연방준비이사회제도” 등으로 어색하고도 정확하지도 않은 직역호칭으로 불리고 있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Wilson 의 임기 첫 해인 1913년 12월에 모법인 “Federal Reserve Act” 가 입법되어 은행과 통화량의 통제가 가능해 졌었다. 이 Board 의 Chairman 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위원들은 각 지역 Federal Reserve Bank 의 President 로 구성된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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