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당시 미국에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편이 노스웨스트 항공 뿐이고 그 것도 일본을 거쳐서 가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에 돈 빌리러 간 박정희 대통령이 한마디로 꽝으로 돌아왔던 시절, 나 역시 6.25를 거치면서 상처뿐인 대한민국을 떠나는 노스웨스트 항공기에 몸을 싫고 하늘에서 내려다본다. 산에 나무가 없어서 붉은 황무지 산천, 가난에 찌든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비행기가 일본 상공으로 들어오면서 눈에 들어오는 첫 번째 놀라움은 검정색으로 빽빽한 일본의 산천이 못살던 한국과의 차이를 말해 주었다.미국에 도착하기 무섭게 한국에서 가져온 여의도 국회의사당 설계도면을 들고 회사를 찾아 인터뷰를 다녔으나 그렇게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어도 그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나 역시 그들 말을 못 알아들으니 일자리가 생길 리는 만무했다. 한국식 영어공부는 지금 현재 미국에서도 우리들끼리 통하는 영어를 배우고 있다. 그런데 난 지금 뉴저지 상록학교에서 매주 한 차례 미국식 영어발음으로 대화법을 내가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미국식 영어공부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 식당에 접시 닦기며 피자집이며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하던 중, 한 한국참전 재향군인 미국인으로부터 엉뚱한 충고를 듣고 엉뚱한 짓을 시작했다.
그 뚱딴지같은 짓이란 것, 그 미국인 왈 “너 건축기사라며? 그런 좋은 기술자가 접시나 닦고 있으면 되냐? 저기 주 정부 청사에 가면 세네터 웨이드 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분한테 부탁해 봐 혹시 일자리 줄지도 모르지 않냐. 세네터 란 상원의원 이란 말인데 생판 알지도 못 하는 사람인 국회의원 미스터 웨이드한테 가서 취직을 부탁 하라는 말인데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허지만 나 같은 사람, 온 세상을 나처럼 천진난만하게 생각하던 사람에게는 그 것도 말이 되는 소리라고 받아들였다.
여러분들도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면서 받아들이면 세상도 여러분을 받아들인다고 생각 된다.
상원의원을 만나는데 미리 약속도 없이 무조건 그 분 사무실로 들어가니 여비서가 잘못 왔다고 날 쫒아 내는 걸 의원이 직접 나와서 날 만나게 된다는 일은, 바로 그때 바로 그 일을 위해 그분이 거기에 대기하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순수하게 사는 사람에게 행운으로 닥아 온다. 그분은 당장 전화 한 통화로 당시에 세계굴지의 엔지니어 회사에 취직을 시켜준 것이다. 1971년 당시 팔순이 가까운 분이었다. 덕분에 미국 온지 1년 만에 건축설계사로 좋은 직장에서 일하게 된 행운을 얻게 되었다.“웨이드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어린 시절 나는 한국동란으로 인해 11세부터 엄청난 불행을 겪으며 살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가지고 살았고 지금의 칠순 중반이 되도록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 주변 모든 이들을 사랑한다. 아직은 우리 한국 혈통들만 사랑 하지만 앞으로 기회가 생기면 미국인들에게 우리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일도 할 생각이고 여기서 태어난 우리 자손들에게 자랑스런 우리 조상들의 정신을 알려주는 일을 내가 해야 할 일 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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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충식 노인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