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림이 있는 산문] 최정 ㅣ똑똑한 할머니, 바보 할머니

2015-07-02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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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글쎄 지들은 하루에 두시간 보고 나는 스물두시간을 보고있는 판에 잔소리만 한다, 너. 인터넷에서 이러저러 하더라고 내 식이 틀리대. 가르치려 들고 타박하는데,나 참 드러워서. 수고한다는 소리는 못할망정 고맙다고 절해야 하는 거 아니니? 애는 점점 무거워져서 이젠 팔도 잘 못쓰게 생겼어. 그새 좀 살만하던 디스크도 다시 오는 것 같고.”

첫손녀를 보고나서 대궐 같은집을 놔두고 짐싸들고 아들네로 들어간 언니가 오랜만에 전화해서 하소연이다. 태어나 이십년을 한 이불에서 자란 언니는 아침에 발딱 일어나 이불 개는 일을 내게 넘기고 도망치던 것 이외엔 내게 참 소중한 사람이었다. 모든 일에 나사가 안맞아 고통스럽게 사는 나와는 달리 현실적으로 현명하고 성실하고 열심으로 살아 일생동안 내게 의지가 되었다. 성당의 거라지 세일에서 골라골라 일불주고 산 옷을 입고다니는 내게 열심히 메이커 옷을 챙겨 보내주고 이 나이 되도록 돈 한푼 못버는 동생에게 용돈도 챙겨주는 언니다. 비행기타고 와서 김치냉장고를 채워놓고 가는 언니는 애들도 열심히 키워 애들이 엄마 알기를 여왕벌 알다시피 하는데 그 당당하던 언니에게 드디어 구박받는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한참 들어주고 나서 킬킬대며 이젠 언니도 애 봐줘가며 구박받는 시절도 들어선거라고 하니까 언니도 웃는다.

주위를 돌아보면 두 타입의 할머니가 있다. 이 한 몸 다 바쳐 힘껏 다 해주고 끙끙 앓는 바보할머니와 절대로 손자 안봐주고 자신의 건강 살피며 취미생활 즐기고 사는 똑똑한 할머니. 언니에게 너희애 너희가 보라고 팽개치고 골프나 치러 가, 했더니 근데 애기가 이쁜데 어떻하니, 한다.


언니가 어떤 타입인지는 이제 결정 났다. 앞으로 꾸준히 구박을 견디어낼 은근과 끈기가 필요할 것이다.

젊었을 땐 모든 할머니들이 구질구질하고 바보같이 보였다. 할머니가 되어보니 바보로 보여도 상관없고 맘 시끄러운 젊음에 비해 속 편한 이 할머니의 삶이 백번낫다. 젊었을 땐 내 사는 방법이 남과 다를 때는 엄청 스트레스 받았는데 이젠 그래, 나는 줄창 바보로 살겠다, 느이들은 열심히 똑똑하게 살아라, 하는 뱃짱이 생긴다. 그래서 늙은 이들이 죽기 싫다고 하는가 보다. (나는 그래도 이 소풍 끝나는 날엔 몸 아픈 것도 끝나리라는 믿음으로 그 날을 애타게 기다리는 중임.)

사는 방법은 여럿이다. 한비야는 일생을 돌아다니고 소화 데레사는 일생을 봉쇄수녀원에서 살았다. 알렉산더대왕은 싸움터만 다니며 살았고 마더 데레사는 빈민굴에서 아픈이들 시중드는 일로 살았다. 스티브 잡스는 엄청난 부자인데도 우리집보다 쪼끔 더큰 집에서 살았고 어떤 이는 페이먼트에 쫒기면서도 큰집에 산다. 친구를 잘 안사귀는 사람도 있고 어딜 가도 금새 친구를 사귀는 사람도 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끼지 않고 쓰면서도 남을 위해선 한푼도 발발 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은 검소하게 살면서 사회의 공익을 위해 선뜻 거금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배고픈 세사람에게 두 그릇의 음식이나 왔을 깨 잽싸게 한 그릇을 채가는 사람도 있고 남을 위해 사양하는 사람도 있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일생동안 남편에게 안보이는 게 예의이며 품위라고 믿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맨얼굴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게 친밀함이라고 믿는 이도 있다.

바보 할머니로 살려면 우선 체력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애기를 돌보는 행위를 진정한 행복으로 느낄수 있는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 바보 할머니 울 언니, 밥이나 열심히 챙겨 먹어. 비타민도 잊지말고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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