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젊은시각 2030] 전윤재 ㅣ 안녕, 마왕

2014-10-31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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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을 했다. 새로 옮겨간 학교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나를 황당하게 하는 일이 있었는데, 쉬는 시간마다 옆반의 아이들이 우리반으로 몰려와 전학생을 구경한다며 창문에 주욱 매달려 있었던 일이다.

당시 한 학급에 학생이 80명에 육박할 정도로 과밀학급 문제가 심각했던 지역으로 전학을 온 나로써는 하루에도 몇명씩 밀려드는 전학생으로 넘쳐나는 학교에서 또 다른 전학생일 뿐인 내가 어째서 이토록 큰 관심을 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쉬는 시간마다 나를 구경하려고 몰려드는 아이들 때문에 동물원 원숭이가 되어버린 것 같아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런 내 복잡한 마음과는 달리 학교 아이들이 우리반으로 몰려들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신해철”이라는 가수가 있는데 내가 그 가수를 기가 막히게 닮았다는 것이었다. 이 황당하다 못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은 막 사춘기의 문턱에 들어서려고 하고 있던 나에게 신해철이라는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었고, 그 이후 나는 한때 나를 동물원 원숭이로 만들었던 그의 팬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팬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소녀팬, 일명 빠순이(그때는 이런 단어도 없었다)로 사는 일은 90년대에도 치열했다. 팬들끼리 모이면 내가 오빠의 부인이라며 싸우기 일쑤였고,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티켓이 판매되지 않던 때라 콘서트를 한 번 가려면 예매하는 일이 그야말로 전쟁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신해철의 실험정신이었다. 익숙해질만 하면 깨고 나가고, 편해질만 하면 판을 엎어버리는 그의 성향 덕에 팬들에게는 그를 향한 기대감과 함께 긴장감이 늘 함께 했다. 지극히도 대중적인 음악을 하던 그는 1992년 어느날 롹밴드가 되어 돌아왔는데, 당시 한국음악시장은 1991년 서태지의 등장 이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롹이 설 수 있는 자리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다수 소녀팬이었던 나를 포함한 그의 팬들은 롹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빠가 하는 음악이니 당연히 들어야 하는 것인가 보다 하고 그의 변신을 지지했다. 하지만 불과 5년 뒤 팬들이 N.EX.T의 음악에 적응이 될 때쯤 그는 팀을 해체하고 유학길에 오른다. 그후 신해철이 보여준 행보들은 팬인 나로서는 쫒아만 가기에도 버거운 파격의 연속이었다.

얼마전 6년의 침묵을 깨고 대중에게 돌아왔을 때도 그의 변화는 놀라웠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독기 빠진, 아주 사람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흡사 순한 양 같은 모습인 그를 보면서 역시 변신의 귀재라며 혼자 너털웃음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유명을 달리했다. 끝까지 참 팬으로 사는 것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다.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 못하게 하는 사람이다. 황망한 중에 지금 현재에 행복하라던 그의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말처럼 그렇게 순간순간을 행복하다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나마 마음이 위안이 된다. 그리고 나도 앞으로 그렇게 살겠노라고 다짐을 한다. 잘가요 오빠, 잘가요 마왕, 잘가요 교주. 작별인사 따위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무슨 말로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행복하세요. 저희들도 행복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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