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어느 날, 일본사람 요시다 기요하루는 2차 대전 전쟁사 연구자료를 수집하던 중 우연히 일본군이 위안부 모집에 깊이 관여했다는 기록을 발견하고 이것을 아사히신문에 넘겨주었다. 아사히가 이를 특종으로 터뜨리면서 위안부 문제는 비로소 일본사회의 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황한 일본 정부는 황급히 진상 조사단을 구성하고 한국정부에 입국허가를 신청하는 한편 위안부 대표들과의 증언 청취 알선을 의뢰하였다. 16명이 대표로 선출된 이 청문회에서 일본 관헌들이 직·간접으로 위안부의 모집, 수송 및 관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은 인도네시아, 타이완, 필리핀, 베트남 등 동남아 4개국에도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런 일련의 절차가 진행되는 과정에 뜻밖에도 아사히와 경쟁관계에 있는 극우 편향인 산게이 신문이 끼어들어 위안부들이 증언하는 주소와 이름들이 신빙성이 없고 강제연행을 증명할 수 없으니 이를 ‘역사자료’로 채택할 수 없다는 반론을 일으키고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동남아 4국은 일본과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조사단을 받아들이기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연합전선 형성에 틈이 생기고 말았다.
비록 그들의 동참이 불발 되었지만 한국은 끈질긴 노력 끝에 1994년 8월 이른바 ‘고노담화’라는 것을 받아냈다. 내용 일부를 일본 측 문헌에서 발췌한다. “--일본은 위안소의 설치와 위안부 모집 그리고 위안소의 경영 및 감독, 그에 따르는 위생 관리와 신분증 발급 등에 참여했음을 시인하는 바이다.”김영삼 정권 때부터 이 불굴의 투쟁이 이어져 오는 동안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불귀의 몸이 되어 현재 54명이 생존하고 있다.
한편 워싱턴에서는 지난달 30일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주최로 페어팩스 카운티 정부청사 뒤뜰 정원에서 위안부 기림비 건립 제막식이 있었다. 미국에서 7번째 기념물이지만 정부청사 내에 건립된다는 특수성 때문인지 국내외의 많은 보도진들이 자리를 메웠었다.
행사가 끝난 뒤 일본에서 파견된 2개 TV 방송기자들이 면담을 자청, 번갈아 가며 정대위 위원장에게 질문의 화살을 쏟아 부었다. “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제를 미국에서 기념비를 세워 나가며 문제를 삼고 있는가?”
김광자 위원장의 대답은 침착하고 논리적이었다. “위안부 문제는 전 세계인의 인권에 관한 문제이다. 나는 미국시민의 자격으로 기념비 건립에 참여했을 뿐 다른 지역 기림비 건립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일본이 사과하였다 하지만 정부차원에서 공식 사과하지는 않았다. 이른바 고노담화 라는 것도 아베 신조 총리는 무효화 하려고 하지 않는가. 교통사고로 상대방에게 상해를 주었으면 마땅히 배상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위안부 문제는 전 세계인이 일본의 양심에 호소하는 부르짖음이요, 30억 여성들의 인권을 위한 분노의 외침이다.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의로운 일에 동참한 마이크 혼다 연방하원의원 등 미국사회 정치인들에게 감사한다. 전 세계 7개국의 크고 작은 의회에서 다수결로 통과시킨 총 13개의 결의문이 지금 일본의 회답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