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최정화 칼럼] 영(靈)과 혼(魂)

2014-02-14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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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Is God within us, or without us?A: God works through us. And, God works as us.

질문: 신(神)은 우리 안에 있나요 밖에 있나요?답: 신은 우리를 통해서 역사(役事)하신다. 그리고, 신은 곧 우리로서 역사하신다.

한국일보에 "English for the Soul" 칼럼을 연재한지 어느덧 8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2006년 여름이던가요? 프란치스코 성자의 "The Serenity Prayer - 평온을 위한 기도"와 함께 차분하고 ‘평온한’ 심정으로 시작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하느님, 저에게 평온함을 베푸소서...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인내를 주시고,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시작된 "English for the Soul." 지금도 ‘평온한’ 느낌으로 늘 현재진행형입니다.


지난 주 오랜만에 만난 지인께서 왜 ‘English for the Spirit’이라고 안하고 ‘English for the Soul’이라 했느냐고 묻습니다. ‘영을 위한’이 아니고 ‘혼을 위한’이라 이름붙인 까닭이 딱히 있느냐는 겁니다. 매우 의미있는 질문이고 또 심심찮게 듣는 질문이라 이번 기회에 우리가 흔히 ‘영혼’이라 부르는 물건[?]의 정체를 나름대로 밝힙니다.

Q: Is God within us, or without us?A: God works through us. And, God works as us.

질문: 신(神)은 우리 안에 있나요 밖에 있나요?답: 신은 우리를 통해서 역사(役事)하신다. 그리고, 신은 우리로서 역사하신다.

예수님 가라사대,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네 안에 있다." 부처님 왈, "모든 게 다 마음 안에 있다. 만법유심이니라." 그런데, 오늘 지문으로 소개하는 문답은 바로 하느님이니 만법이니 하는 진리의 실체를 ‘God’라는 표상으로 한번 짐작[?]해보기 위해 제 나름대로 꾸며낸 장면입니다. 과연 ‘비존(非存)의 존재’요 ‘없이 계신’ 하느님을 아는 방법은 있는 걸까요? 답은, ‘없다’입니다. 아는 순간 모르게 됩니다. 안다는 신은 이미 틀린 신입니다. 다만 짐작할 뿐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보통 네가지로 풉니다. ‘영/혼/백/육’입니다. 몸[肉, 육]은 지수화풍 4대가 모여 꾸며진 물질입니다. 땅/물/불/바람 네 요소가 공(空)에서 나와 몸이 됩니다. 넋[魄, 백]은 몸과 마음 사이, 육안으론 볼 수 없는 경혈이나 에너지 차크라를 구성합니다. 얼[魂, 혼]은 알고/느끼고/뜻하는 ‘지정의(知情意)’의 총체입니다. 시가 나오고 음악이 나오고 그림이 나오는 곳이 바로 얼입니다. ‘나’라는 ‘에고’를 단단히 만드는 녀석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을만큼 놀라거나 또는 스스로 육신의 죽음을 체험할 때, 흔히 ‘혼비백산(魂飛魄散)’이란 말을 씁니다. 얼은 날고 넋은 흩어진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이죠. 우리 조상들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위로 오르는 얼과 아래로 흩어지는 넋이 같지 않음을! 그리고, 이 ‘혼백’을 너그럽게 품고 있는 무극(無極) 자리를 일컬어 ‘영(靈)’이라 했고 이 ‘영(靈)’은 그대로 하느님 자리에 맞닿아 있음도 훤히 알아채고 계셨답니다.

Q: Is God within us, or without us?A: God works through us. And, God works as us.


질문: 신(神)은 우리 안에 있나요 밖에 있나요?답: 신은 우리를 통해서 역사(役事)하신다. 그리고, 신은 우리로서 역사하신다.

다소 지루한 형이상학 강의, ‘영혼백육/지수화풍’ 그리고 ‘혼비백산’ 정도로 간단히 정리합니다. 그럼,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 왜 ‘English for the Spirit’이 아니고 굳이 ‘English for the Soul’인가? 영민한 ‘Soul’들은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Spirit’은 아무 것도 따로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영을 위한 무엇’이란 발상은 이미 빗나간 게 아닐까요?’영(靈)’은 바로 신이요 무극이요 하느님이요 하나님입니다. 내 영이 바로 하느님 영입니다. 인내천(人乃天)이라던가요?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Spirit’은 따로 ‘soulfood’가 필요 없습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바로 그게 우리의 ‘영(靈)’입니다. 나서 죽고 때묻고 늘고 줄고 하는 건 바로 혼/백/육입니다. 우리가 평생 [또는 여러 생] 완덕(完德)에 이르고자 닦고 기름치는 건 얼/넋/몸입니다. 영은 이미 온전합니다. 이미 완덕인 ‘영(靈)’을 깨닫는 게 니르바나요 구원입니다. 얼이 공부하지 영은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English for the Soul’입니다.

"God is Spirit, and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Truth."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복음서 4:24] 왜냐하면, God works AS us! 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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