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창] 윤원정 ㅣ 그 곳
2014-01-22 (수) 12:00:00
난 늘 이모할머니와 이모부할아버지 두분의 집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시간이 멈춘 곳’이라고 설명을 한다. 12년 전 어리버리하고 어린 우리 가족이 낯선 미국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만난 사람들은 이모할머니와 이모부할아버지였다.
공항에서 나왔을 때 처음 보는 할머니 한분과 백인 할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확실히 다른 공기와 설명할 수 없는 낯선 느낌은 나를 몽롱하게 하였다. 처음 보는 ‘미국 집’은 신기했고, 그 집에 있는 고양이들 역시 새로운 존재들이었다. 살짝은 어둡지만 은은한 불빛으로 밝혀진 거실과 낯설지만 포근했던 미국에서의 첫날을 잊을 수 없다.
그 후 이모할머니댁은 2년동안 우리 가족에게 낯선 땅에서의 쉼터 같은 존재였고, 해가 지나가면서 작고 큰 변화들이 찾아왔지만, 그 곳은 늘 첫날의 그 날처럼 행복한 나른함과 포근한 공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 곳의 하루는 라디오 소리로 아침 일찍 시작했으며, 부지런한 이모부할아버지의 발걸음 소리와 커피 냄새로 잠든 집을 깨웠다. 그 곳의 오전은 따뜻한 햇빛 속 고양이들과의 나른한 휴식으로 채워졌으며, 이모할머니가 두손 장바구니를 들고 고양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집에 돌아오실 때 그 곳의 오후가 시작되었다. 저녁은 늘 듣는 라디오와 전날 먹다 남은 음식과 새로 만든 음식들로 가득 했고, 그 곳의 밤은 어두운 거실 속 빛나는 텔레비전 화면, 무릎 위에 잠든 고양이들, 그리고 작은 소파를 채우며 영화에 집중하는 우리들이었다. 이 지극히 평상적이고 시시한 하루하루들은 나에게 소소한 행복감을 주었고, 지금은 내겐 없어선 안될 쉼터가 되었다.
12 년 전의 그 곳과 지금의 그 곳은 신기하게도 변함없는 포근한 행복감을 준다. 하지만 우린 시간의 흐름을 피할 수 없다. 나이든 고양이 세마리는 떠난 지 오래고, 3살이었던 회색 줄무늬의 고양이만이 16살의 나이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매일같이 자전거를 타시던 이모부할아버지는 더이상 운동을 하지 못하시고, 이모할머니는 언제 떠날지 모르는 16년 동안 함께한 고양이의 마지막을 두려워하신다. 나는 더이상 9살의 아이가 아니며, 천천히 느껴지는 변화들을 생각하며, 언젠가 사라질 그 곳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