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이예진 l 핫핑크의 위력

2013-02-11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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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마음의 변화에 따라 모든것이 달라져 보인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첫사랑 때문에 우울해하고 있을 때다.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가을이라 산들바람은 불었지만 아직 더웠다. 햇살과 바람이 창밖에 이름 모를 덤불들과 엉켜 이상한 무늬의 그림자들로 방안을 물들였다. 평소 같으면 그늘과 빛이 공존하는 이런 시간에 고양이처럼 노곤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배로 누워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때의 나는 커튼을 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었고 괜시리 혼자 고독함을 씹고 있는 십대 소녀였다.

거실로 나와 티비를 켜보니 ‘금발은 너무해’라는 영화를 상영해주고 있었다. 여주인공은 열렬히 핫핑크를 사랑했고, 또 무식하리 만큼 당당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얕보는 이들에게 보란듯이 공부에 열중하여 성공했다. 내가 일일이 하나하나 까서 먹는 자몽처럼, 그녀는 상큼했고 통통 튀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너무나 멋져 보였다. 그날 저녁, 집앞 마켓에서 99센트에, 어린 나에게는 조금 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했던 바로 그 핫핑크색 매니큐어를 샀다. 떨리는 마음으로 손톱을 칠하면서 갑자기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었다 – 아니, 멋져지고 싶었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학교 귀가 후 바로 손톱을 핫핑크로 칠했고, 다음날 아침 등교 전에는 다시 지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직 정말 소심했던 나는 그때 당시 어렸을 때 봉숭화물을 제외하고 손톱에 매니큐어를 하고 학교에 간 적이 없었다. 이는 한국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에너지를 다시 되찾았고 더이상 우울하지도, 무기력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핫핑크 매니큐어는 내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나답지 않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며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그 늪에서 빠져나왔던 것이다. 그 영화 덕분에 나에게 핫핑크란 색깔은 튀어도 남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당당한 능력있는 여성이라고 각인되었고, 그 자극은 나를 다시 깨웠다. 사실상 나에게 표면상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집에서만 은밀히 바르던 그 핫핑크 매니큐어는 분명 나를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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