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희봉 칼럼 / Try to Remember

2010-11-03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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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y to remember/ 9월의 어느 가을날을/ 그 땐, 세월이 느리게 흘러/ 가을은 잘 익은 과일처럼 감미로웠죠// Try to remember, 그때 당신은 여리고 싱싱한 청년이었지요/ 그때가 그리울 때면, 그 추억을 따라가 보세요, 꿈꾸듯 걸어보세요."

’브라더스 포’의 화음에 넋을 놓고 가을 노래를 듣다가 R형 생각이 났다. 갑자기 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지 벌써 서너 달이 지났다. 이순(耳順)이 넘었어도 건강미 넘치는 뽀얀 살결에 부드러운 머리 날리며 청년같이 살던 형의 환우(患憂)가 믿어지지 않는다. 십 수년 전 내가 처음 만났을 땐, 그는 벌써 신문에 수필칼럼을 오래 써오던 중견이었다. 타고난 직관력과 감성이 잘 녹아진 그의 글이 좋아 자주 만났었다.

한낮의 햇살이 약간 기운 오후면 직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의 일터로 찾아갔었다. 사변 때 공직에 계시던 아버지가 납북되신 게 우리들의 공통점이었다. 둘 다 혈육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자라온 성장기가 우리를 남다른 인연으로 묶어주는 듯 했다. 그의 글엔 자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드러났다. 그것은 오래 참아왔던 내 속울음이기도 하였다.


그의 가게로 가는 길은 빅토리안 고택들과 아담한 벽돌 공동주택들을 지났다. 도심임에도 철 따라 흰 목련이 환한 등불처럼 피는 매그놀리아와 잎 넓은 시카모어 가로수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자라 낮해를 가릴 만큼 운치있는 길이었다. 가을엔 낙엽이 살아온 세월만큼 수북히 쌓였다. 그 길을 오늘도 우리가 나눌 여리고 싱싱한 시절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소풍가듯 걸어갔다.

길모퉁이에 그의 식품점이 있었다. 그가 종일 지키는 카운터 옆에 버켓통을 깔고 앉아 드나드는 손님들을 같이 맞았다. 오래 한곳에 살아온 백인 노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낮술에 취한 흑인들이나 갓 이민 온 뜨내기 노동자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의 글 소재로 자주 등장했던 그 풍경을 그가 어떻게 다듬어내는지 지켜보는 학습장이기도 하였다.

그가 가게를 팔고 난 뒤론 그 길을 가지 못했다. 자연히 형과 만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쉼 없는 창작욕으로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수척해진 그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는 우리들 보다 그는 병을 대처하는 데 대범했다. 오히려 그의 영성은 어느 때보다 맑아 보였다. 병이 찾아오니 더욱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의 자비를 구하는 겸손한 마음이 든다고 소년처럼 웃었다. 병을 극복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꼭 낫는다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기도해달라고 하신다. 그 와중에도 내 아내 기도빨이 더 센 것 같다고 아내 손만 흔들어 좌중을 웃긴다.

그 즈음 칠레 광부들의 생환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에 환호하는 어느 작가의 글을 보다가 마음에 닿는 구절을 발견하곤 형에게 주려고 오려두었다. "두려움은 영혼을 마비시키는 독극물과 같다. 처음 지하에 갇혔을 때 절망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두려움에 감염된 사람들을 치료하는 유일한 해독제, 희망이 있었다. 한정된 실망은 받아들여야하지만 무한한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무한 희망만이 사람을 절대 살린다"

"Try to remember, 지금 당신의 손을 잡고 동행하시는 분을 기억하세요/ 그 분과 함께 걸으세요. 꿈꾸듯 따라가세요." 그 길은 건강한 젊음을 되찾는 길이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무한 희망의 길이다. 절대 회복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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