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창 / 이금자

2010-08-19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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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의 DNA

청상과부의 며느리로 시집온 어머니는 그렇게 건강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노상 속 앓이에 가슴 앓이에 시력도 별로 신통찮은 외동딸 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며느리가 항상 고마운것은 손주들을 줄줄이 낳아 당신 외아들의 뒤를 이을 자손이 많아 졌다는 것으로 행복해 했습니다. 그렇다고 아홉이나 낳은 손주들이 다 잘 자란것도 아닙니다. 막내야 해방후에 낳았지만 모두 일제시대에 낳았기때문에 산모나 아이나 제대로 먹지못해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도 죽고 한달 만에도 죽고 어떤애는 서너살되어서 죽고 아홉중에 잃은 손주가 넷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6.25 사변으로 청년이 채 되지 않은 손자를 생사도 알수없이 잃고 말았습니다. 그 손자를 기다리느라 할머니는 피난도 가지않고 혼자 집을 지키셨습니다. 나까지 피난가면 그애가 집에 돌아 왔을때 그 마음이 어떻겠느냐고 하시면서. 넷 남은 손주들을 돌보는 할머니의 사랑은 극진했습니다.
차가운 생계란을 밤새 가슴에 품었다가 새벽일을 나가는 큰 손자에게 아래 위를 쇠 젓가락으로 퐁 뚫어 구멍을내어 따뜻하게 먹여 보내며 할머니의 하루는 시작 되었습니다. 어쩌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화가나서 주먹이라도 불끈쥐면 앞치마폭으로 가리며 “차라리 날 때리게 응 날 때려” 하며 막아서는 할머니의 마음을 아무도 아프게 할수는 없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전차 정류장에 나와서 기다리다가 내가 전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책가방을 빼앗듯이 낚아 채어 가지고 먼저 집으로 오시던 할머니- 친구들 보는데 챙피하다고 방정을 떨어도 아랑곳 하지않고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오는 손주가 안타까워 그냥 집에서 기다릴수 없었던 할머니-

그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오십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그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어느덧 내게도 손주가 다섯이 되었습니다. 이놈은 이래서 이쁘고 저녀석은 저래서 이쁘고- 손주를 좀 봐달라는 부탁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오케이” 하고 달려 갑니다. 왜냐하면 조금더 자라면 그들은 날 찾을 필요가 별로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할머니 우리가 좀 바빠서…” 더 자라기 전에, 내가 필요하다고 할때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가는 내 핏속에는 아마도 우리 할머니의DNA 가 얌전히 도사리고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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