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꽃이 숨 쉬는 욕실

2009-04-14 (화) 12:00:00
크게 작게

▶ 임경전 수필가, 은퇴 의사

매스터 베드룸에 붙어있는 욕실의 한 구석, 양쪽으로 큰손 한 뼘 만큼의 넓이로 천장까지 아래 위 수직으로 가려진 것 이외에는 막힘이 없어 동쪽과 북쪽, 같은 크기의 들창을 통해 보는 시야가 넓다.
동창을 통해서는 옆집의 지붕과 홈통 일부, 배이 윈도우(Bay Window) 등선이 보이고 그 지붕의 스테드를 약간 들쳐 올리고 지푸라기를 입에 문 새가 집 짓겠다고 들락날락 분주하다.
바로 또 한 옆집은 옆이나 뒤가 너무 경사져 있어 빌더(Builder)가 심어놓은 잔디를 파헤쳐 버리고 크고 작은 암석을 트럭 가득 실어와 경사진 땅에 쌓아 올리고 한가운데 인공폭포를 만들어 놓고 사계절 중 겨울 빼고는 항상 물이 졸졸 흐르는 경치를 볼 수 있게 했다. 그 집 주인은 부엌 들창을 통해 그 운치를 만끽하고, 나는 동창을 통해 한여름에 색깔 있는 폭포수를 본다. 그리고 한여름 밤에는 심심치 않게 반딧불도 볼 수 있다.
지금 그 폭포수 주위에는 개나리가 한창이다. 그리고 그 집 뒤 작은 언덕에는 각기 수령(樹齡)이 다른 나무 사이사이로 동이 틀 무렵부터 야등(夜燈)이 켜질 때까지 수시로 변하는 경관을 즐긴다.
북쪽으로 나 있는 들창을 통해서도 끝없이 펼쳐 있는 파란 하늘, 우뚝 솟아있는 나목(裸木) 사이사이로 보이는 골프장에는 이른 아침 또는 해질 무렵 어김없이 나타나는 사슴들, 영상에나 담아볼까 고개를 들면 어찌나 귀가 밝은지 고개를 들고 도망갈 태세다. 그 사슴들의 통로인 작은 계곡 끝에 자목련이 한창이고 그 옆에 너무 바싹 붙여 심어진 배나무 하나가 하루가 다르게 배꽃이 부풀어 오고 있다.
시골 초가집 지붕 위에 소박하게 피어 있는 박꽃과 함께 달빛에서 보는 배꽃을 월하미인(月下美人)이라고 했던가. 해마다 다람쥐(chip monk)에 의해 밤톨 크기만 할 때부터 단 것만 골라 먹어 제끼니 나는 첫해 단 한번 맛본 이외 그 재미는 뺏겼더라도 배꽃향이 코끝을 간지르고 안개 짙은 날이나 이슬 머금은 배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대자연 감상이란 것이 원경(遠景), 근경(近景), 변경(邊景), 혹은 뒤편에서 감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펼쳐 있는 경치를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멋 특이한 만족감이 있다. 더욱 눈이라도 소복소복 나무 잎에 쌓여 있을 때는 한 잎 따서 입안에 넣어 보면 얼마나 속이 후련할까. 짜릿한 행복감이 혀끝을 통해 전신으로 번질 것이다.
나의 샤워 룸 동창과 북창 사이 90도로 각을 이룬 맨 구석에 빛바랜 작은 대바구니 손잡이에 묶어, 아직도 천장 높이 두둥실 떠 있는 딸이 사다 준 생일 선물 풍선을 주축으로 양 옆에 권투 선수 주먹만 한 소라 껍질 2개, 등받이에 받쳐서 천장을 향해 있고… 그 가운데 두 뺨 길이로 자란 매직 플랜트(magic plant)가 완두콩 같은 주머니 약 30개 쯤 대롱대롱 매달고 있다.
그 소라 껍질 바로 옆에 필리핀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렸는지 파도에 밀려 올라왔는지 눈 맑은 소년이 모래밭에서 주웠는지 아직도 심해(深海)의 내음이 나고 색상이 신선해 보이는 자이언트 스파이더 쉘(Giant Spider Shell), 옆과 뒤로 란(蘭)을 곁들여 바다를 연출해놓고 있다.
자쿠지에 물을 가득 채워 놓으면 동창으로 아낌없이 퍼붓는 파란 하늘의 빛을 받아 영락없는 열도의 바다이다.
고대 영웅호걸에서부터 대작가, 케네디 대통령이 말했듯이 인간에게 꿈을 키워 주는 곳, 모태의 양수 속을 자유로이 우주선 타듯 유영하며 편안하게 자라온 탓일까. 바다는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 그 바다 옆 하얀 나의 화장대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생긴 꽃이 끊임없이 화병에 꽂혀 있어 동창의 햇빛을 받아 더욱 싱싱하고 그 향기 또한 욕실 전체에 퍼뜨려 준다.
일요일 밤 문우(文友)의 출판기념회에 다녀왔다. 사심이 없는 문인들의 모임은 항상 즐겁다. 덤으로 꽃까지 가지고 왔으니 집안 곳곳에 자연을 숨 쉬게 하는 것도 커다란 행복인데 더욱 바다를 연출해 놓은 배스 룸 화장대는 꽃꽂이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자연은 참으로 위대하다. 사람이 슬플 때 슬픔을 덜어주고 고통도 치유해 주고 마음이 싱숭생숭 거칠어질 때 가라앉게 해 주고 웃음을 잃었을 때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해 준다. 또 마음이 얼었을 때 따뜻하게 녹여주고 이성을 잃었을 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시공간(視空間)적 여유를 주고 신선한 공기를 폐부 속까지 불어 넣어 활기를 되찾게 해주는 명의.
집 앞마당 작은 화단에는 오월화의 여왕인 모란이 꽃 피울 준비에 부산하다. 연이나 자연 속 꽃은 행복을 나눠주는 여신인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