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이 오는 소리

2009-03-18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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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효 FDA 약품 심사관

나는 계절의 변화를 참 좋아한다. 봄만 되면 어김없이 알러지가 심해 기후 좋은 곳에 가서 살라는 권고도 많이 받았지만, 나는 사계절이 있는 이곳이 좋다. 계절의 특성이 가져오는 그 변화는 어쩌면 우리 인생의 굴곡과 변화를 닮았는지 모른다. 심을 때와 거둘 때, 올라갈 때와 내려 올 때, 땀 흘릴 때와 한가로운 여유가 적당히 조화된 우리 삶의 모습 말이다. 대부분의 교향곡이 네 악장으로 되어 있다는데, 음악으로도 계절과 같은 인생의 변화를 그리는지 모르겠다.
어느덧 봄이 조용히 왔다. 조용하게 소리 없이 내리는 밤비를 “님이 오는 소리”로 표현한 유행가가 있는데, 봄은 어쩐지 조용한 밤비를 연상시킨다. 봄의 색깔은 아무래도 개나리 빛 노란색인데, 따뜻한 양지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처럼 공연히 한가롭고 따뜻한 여유를 느끼게 한다. 봄은 요란하지 않다. 구슬땀을 쏟게 하는 무더운 폭염의 여름, 땅에 뒹구는 가랑잎 흩날리는 찬바람으로 옷깃 추스르게 하는 가을, 대지를 꽁꽁 묶어놓는 강추위와 폭설의 위용을 자랑하는 겨울과는 달리 봄은 포근하다.
봄은 소망의 계절이다. 겨울 내내 꽁꽁 얼어붙었던 회색 빛 죽음의 땅에서 새파란 새싹이 솟아나는 생명의 신비가 새삼스러운 계절, 그래서 다시 한 번 소망과 기대를 회복시켜주는 고마운 계절이다. 인생 여정 곳곳에 예기치 않는 장애물과 가시밭이 숨어있지만, 꼭 붙잡은 소망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참된 소망과 보상에 대한 확신은 매서운 겨울과 같은 고난의 학교를 통해서만 더욱 더 확실해 진다. 고난의 학교는 자신을 낮추고 비우게 하며 겸손의 모습으로 바꾸게 한다. 자기 자신만을 신뢰하고, 부족한 인생들에게 소망을 걸었던 헛되고 허망한 것들을 내려놓게 하기 때문이다.
만일 다윗이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로 여러 번 그를 죽이려 했던 시련을 준 고난의 학교, 자기 친자식인 압살롬의 반역으로 오랜 세월 피해 다니며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절망을 경험한 고난의 학교를 거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위대하고 가장 부러운 고백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본인도 현재 초급 정도의 고난의 학교 수업을 받고 있는데, 이 수업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고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졸업하리라는 기대를 꼭 붙잡는다.
봄은 또한 부활의 계절이다. 만물의 소생으로 우리의 궁극적 소망인 부활을 더욱 구체적으로 사모하게 한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부활의 봄에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될 것이다. 나는 사도들의 믿음을 부러워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부활 승천 후 약속대로 곧 다시 오실 것을 믿고 바라며, 장가가지 않은 사람은 그냥 독신으로 있는 것이 좋다고 까지 하였는데, 그 후 이천년이 지난 지금, 말하자면 예수의 재림이 그만큼 가까워진 이때에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얼마큼 현실로 받아들이며 애타게 사모하는지 질문해 본다.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썩지 않을 부활의 몸, 신령한 몸을 가질 것이다.
미국을 비롯해 온 세계에서 금전만능의 허망한 거품이 꺼지고, 사방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신음하며, 들리는 소리마다 답답하고 침울한 소식뿐인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어려움도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참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단지 소극적으로 이 어려움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어려움의 과정, 고난의 학교를 통해 그 소망이 더욱 확실해 진다는 믿음으로 오히려 감사함으로 이 과정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부활의 계절인 이 아름다운 봄에 우리의 짧고 험한 인생의 참된 의미와 궁극적 소망이 무엇인지 조용하게, 진지하게 되돌아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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