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피니언] 김웅수 회고록-휴전 후의 한국군

2008-01-23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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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웅수 예비역 소장, 경제학 박사

육군 군수 참모부장(1)


내가 원치 아니했던 군수국장에 취임한 것은 이형근 대장이 참모 총장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아니한 1956년도로 기억한다. 당시 군의 군수군기가 해이돼 원조 당국의 불평이 심할 때였다. 나는 군수문제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대신 전임자는 조선 경비대 시절부터 약 10년간 이 분야에 경험을 쌓은 분이었다. 나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전임자에 대한 책임 전가 대신 우선 나 스스로의 공부가 필요했다. 나는 오래 통위부 시절부터 군수국 근무의 경험이 있던 3기생 출신 황필주 준장을 나의 차장으로 영입했다. 그리고 보급에 이해영, 정비에 병기병과의 이영진, 예산에 재무병과의 황인성, 시설에 공병병과의 조성근, 기획에 송인률 대령 등이 과장으로 나를 도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미 참모 지휘 대학에서의 참모학 교육을 상기하면서 군수 문제를 5대 분야, 즉 조달, 저장, 보급(분배), 정비 및 페품처리에 대한 현실을 통계를 통해 파악하며 원칙론에 입각해 정책 방향을 정리하면서 불원 예정되었던 국방 연구원의 ‘육군 군수정책’이라는 강의를 통해 육해공군의 고위 간부학생들의 반영을 살피기로 하였다.
이 때 내가 파악했던 숫자로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내가 취급하는 군원이 1년간 3억불, 당시 한국정부 연간 총 예산이 3억불이며 그의 반이 국방비이고 내가 취급하는 품종의 수가 12만 5,000종이었다. 내 나이 33세로 나의 낮은 학력과 경험으로는 중책을 담당함에 두려움이 앞섰다. 국민이 나 같은 자에게 이러한 중책을 맡기면서 안심될까 하는 우려감에 사로잡혔으며 그런 생각은 내가 육군 편제를 바꾸는 책임을 지고 군수국을 군수 참모부로 승격시킨 전후의 4년간을 통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 국방 연구원에는 현역 3성 장군을 위시해 대령 이상의 쟁쟁한 육해공군 현역 장교와 일반 정부의 과장급이 공부하고 있었다. 다행히 나의 강의는 호평을 받았고 단시간 내에 방대한 군수 분야에 대한 실정을 파악할 뿐더러 착안한 정책 방향에 대한 동조를 받게 되어 내가 군수 계통에서 4년간에 걸친 기본 방향이 이런 절차를 통해 결정된 셈이다.
내가 군수국장에 취임된 지 수 일밖에 되지 아니했을 때 일어난 일이다. 어느 업자의 불평이 있었다. 내용인즉 이기붕 당시 국회의장의 부인인 박 마리아 여사가 관여하고 있던 제대자를 위한 피복 제조업체가 있었다. 이 회사가 제대자 피복 입찰에서 수의계약으로 단독 낙찰되었다는 불평과 함께 시정을 요구해왔다. 증거 없이 불평을 못하리라 믿은 나는 당시의 조달감에게 문의해보았다. 조달감은 당시 국방장관의 의뢰로 임명된 사람이고 국방장관은 정치인이었고 이기봉 씨와의 관계로 보아 있을 수 있는 일이나 나에게는 공정한 처사를 위한 시험을 받게 될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나는 주말을 이용해 총장을 수행, 부산지구 순시를 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조달감에게 내가 출장에서 돌아올 때까지 수의계약을 취소하고 규정대로 경쟁 입찰을 할 것을 지시하며 정치의 힘이 작용한다면 내가 군문을 떠나는 각오가 돼있음을 알려두었다. 출장에서 돌아와 보니 수의계약은 취소되고 대신 경쟁 입찰이 실시되었다. 그 대가로 나는 박 마리아 여사 측 대표들로부터 암묵적 시위를 받았으며 종국에 가서는 족청이란 꼬리표를 받기 시작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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