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인 칼럼/ 지는 낙엽의 깊은 생명력

2007-10-30 (화) 12:00:00
크게 작게
왕태건목사(가득한교회)

낙엽의 정취만큼 마음에 진한 여운을 주는 감동도 흔치 않다.

눈을 가득 채우는 자연의 고고한 색의 향연 앞에 펼쳐진 스러져가는 생명의 안타까움이 마음을 흔든다. 이렇게 스며드는 낙엽의 시린 아름다움이 그저 무상하기만 한 것은 아니니 생명이란 참으로 기이하다. 마음이 또 다시 숙연해진다. 그 마음에, 오늘도 불현듯 스치는 길거리 단풍든 나뭇잎들, 땅에 수북한 낙엽이 무언의 메시지를 전해온다. “변해야 산다.”
“아무 변화도 없어요”, “언제 팔릴지 모르겠어요”, “그냥 지내요”, 요즘 만나는 교우들의 공통된 대답들이다. 이민생활에 뭔가 변화가 일어나길 바라는 안타까움이 말을 건네는 내 마음에 무겁게 다가오곤 한다.


미국생활만이겠는가. 이 땅 어디에서 들려오는 소리인들 이보다 더 낫겠는가. 철옹성같이, 완고한 장군같이 생활을 옭아매기만 하는 것 같은 요즘 세상살이다. “목사님, 기도해주세요”. 천근만근이나 되는 ‘기도소리’다. 살고자하는 생명력의 몸부림이다.

인생의 변화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 인생에는 생명과 죽음이 같이 있다”고 바울은 아파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 나는 내 안의 생명의 법을 따르고자 하나 또 다른 나의 육신의 법, 죽음의 법을 따르려 한다”(로마서7장). 그래서 바울은 참된 인생은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의 기운을 아는데서 시작된다고 고백한다.

초대교회 어느 수도자의 기도 시, “눈송이는 불꽃을 낼 수 없다. 물은 불이 될 수 없다. 가시나무는 무화과열매를 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깊은 내면이 정결해지지 않은 마음은 세상의 말과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겉모습의 삶과 내적 생명의 모습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사는 모습은 눈송이들로 가득한데 불꽃 내기를 갈망하고 있는가, 혹은 나는 본래 무화과나무인데 가시나무 같은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 왜 무화과열매가 맺혀지지 않느냐고 한숨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인생을 움직이는 참된 동역이 무엇인지 깊이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동력을 사용하고 있는가? 인생 변화의 첫걸음은 생명력의 발견인 것이다.

1950년대 유명했던 헐만이라는 피아노 교수는 나치독일 수용소 생존자였다. 그는 수용소에서 노동에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매일 잠들기 전 한 시간씩 나무 침대를 피아노 건반으로 삼고 연습했다고 한다. 그의 내면에 살아있는 생명력이 이끄는 대로 그는 소리가 나지 않는 ‘그의 피아노’ 나무침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그의 피아노 인생을 계속했던 것이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나의 귀에는 아름다운 곡들이 생생이 울렸습니다.”(최효섭 예화집)

생명력은 인생의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를 움직이고 있다. 생명력, 꿈, 인생의 성취, 그 힘이 이끄는 인생, 행복하지 않겠는가? 무엇이 이 생명력을 막고 있는가. 세상의 완고한 벽들, 나를 옭죄는 것들, 나를 죽이는 생각들, 버려야 산다. 그래야 생명력이 회복된다. 세상의 여건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고달픈 인생보다는, 생명력이 내 인생을 이끌도록 하는 인생에서 아름다움을 보지 않겠는가.

죽지 않는 아름다움은 식상하다. 낙엽의 아름다움은 마음을 시리게 가슴을 저며 든다. 그리고 새 생명으로 돌아오라는 기대를 가슴깊이 간직하게 한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는 생명력이 새 인생에 대한 기대를 일으킨다. 내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낙엽을 보며 물어보자. 그리고 한번 변해보자. 버렸는데도 깊어져만 가는 생명력의 신비에 가까이 다가서는 자신을 발견해보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