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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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의 테마여행 - 마리 앙투아네트

2007-07-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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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후 앙투아네트는 다른 여자

콩시에주리 감옥에서 매일 기도하며 의젓하게 단두대에 올라

왜 증오의 대상 되었나
마리 앙투아네트(1755~ 1793)는 루이 16세와 함께 프랑스 혁명 후 단두대에서 사형된 프랑스의 왕비다. 원래 그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였으나 프랑스와의 연합을 원하는 어머니 테레지어 황후의 억지에 못 이겨 14세에 부르봉 왕가에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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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혁명이 일어나기 전 해인 1788년에 그린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왜 프랑스 국민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백성은 식량난으로 허덕이는데 베르사유 궁전에서 매일 호화판 파티를 벌인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사람을 차별했기 때문이다. 정부나 회사에서 높은 사람의 부인이 일부 참모의 부인만 집에 불러들여 파티를 열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한다면 남편이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악평을 듣게 마련이다. 앙투아네트 왕비가 그랬다. 남편인 루이 16세를 제치고 인사에 간섭했으며 그녀에게 잘못 보이면 파리에서 출세를 할 수가 없었다. 베르사유 파티에 불려가지 못하거나 파티장에서 모욕을 당한 귀족 부인들이 왕비를 증오해 갖은 악성 루머를 퍼뜨린 데에서부터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극은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파리에는 “카더라” 통신이 대유행이었는데 궁정의 뒷이야기가 파티 하루 만에 시내에 퍼질 정도였다.
남편인 루이 16세는 성불구여서 결혼한 후 7년 동안이나 앙투아네트와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같은 컴플렉스 때문에 왕비와 부딪치는 것을 피하게 됐고 그녀의 방탕생활을 수수방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부 관계의 고민은 그녀가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테레지어 황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 어머니는 마리의 오빠를 프랑스로 보내 루이 16세에게 성치료를 받도록 설득했다. 그 후 루이 16세는 성기능이 회복되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3명의 자녀(사진)를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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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앞에는 법원이 있다. 이 법원 청사의 끝부분 건물이 바로 프랑스 혁명 때 마리 앙투아네트 등 귀족들이 갇혀 있던 유명한 ‘콩시에주리’다. 이곳에는 지금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감방이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으며 기요틴(길로틴)에 끌려 나가기 전 귀족들의 비참한 모습들이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어 당시의 공포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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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에 불려 나가기 전 귀족들이 대기하던 콩시에주리 홀.>

오스트리아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하기 위해 이들을 파리에서 탈출시키는데 까지는 성공했으나 미련하게도 왕과 왕비가 하인과 미용사까지 모두 거느리고 가는 바람에 행렬이 화려해져 시민군에게 들키고 말았다. 앙투아네트의 사형 죄목은 사치생활이 아니라 탈출을 둘러싼 적국과의 내통이다. 그녀는 콩시에리주리에 갇힌 후 완전히 신앙인으로 변해 기도로 하루를 보냈다. 그녀가 남긴 유언은 없다. 단두대에 오르다가 사형 집행인의 발을 밟자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에요”라는 말을 남긴 것이 전부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형 당하는 것을 보기 위해 혁명광장(콩코드 광장)에는 새벽부터 수만 인파가 몰렸으며 그녀는 마차가 아닌 청소차에 실려 나타났다. 단두대에서 보통 사람은 땅을 향해 엎드리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기요틴이 내려오는 것을 보도록 하기 위해 머리를 하늘 쪽으로 향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그녀의 애인이었던 스웨덴의 페르센 백작은 가산까지 정리해 가며 그녀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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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감방을 안내하는 건물 내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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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당시를 재현한 콩시에주리 감옥. 기도하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감시병이 지켜보고 있다. 탈출 가능성 때문에 감시병은 잠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앙투아네트는 감시병 앞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모욕적인 대우를 감수해야 했다.>

이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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