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피니언] 삶과 생각-내가 반한 남자

2007-06-13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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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우(전 워싱턴정신대문제 대책위원장)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 간판을 걸고 희생자 할머니들의 평생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해 일본정부의 양심있는 공식 사과를 촉구하기 시작한 것이 꼭 15년 전의 일이었다. 1992년 12월로 그때 내 나이 59세였다.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부흥개발은행(통칭 세계은행)에 근무 중이었다. 25주년 근속을 몇 달 남기지 않고 있을 때였다.
나는 30세 중반에 미국에 와서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으니 가정을 가진 여성으로서 특히, 네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시어머님을 모신 며느리로서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천생 타고난 불굴의 한국의지가 아니었던들 어찌 그 힘든 세월을 견디어 낼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을 해도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그 아이들이 지금은 모두 40대, 50대를 맞고 있다. 제각기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을 키우고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안 있으면 큰 손녀딸의 열여섯 살 생일이 다가온다. 그런데 내 가슴이 요사이 왜 이리 설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손녀딸 ‘Sophie’의 이름을 나는 혼자 마음속에 또 하나 지어 주었지. ‘소희’라고. ‘소희’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한 숙녀로 등단하는 기쁜 날을 맞이하게 되는데, 나는 그날을 맞이할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있다. 오히려 어떻게 소희의 ‘우아한 숙녀됨’을 찬양하고 축복해 주어야 할지 걱정만 태산 같다.
십년 전의 일이 생각난다. 정신대 생존자 할머니 한분을 모시고 미 법무성의 로센바움 특별수사국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로센바움 국장은 세계2차 대전의 전범자들의 은신처를 세계 방방곡곡 샅샅이 뒤지면서 그들의 범죄 처벌을 위한 색출작업에 앞장서고 있는 분이다. 그분의 관심이 2차대전시의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만행과 그 전범자들의 처벌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그는 정신대 희생자들과 그 생존자들에게 더욱 특별한 관심을 쏠리게 되었다. 일본군에게 끌려갈 때 열세 살이었던 한 할머니와의 만남을 그분이 몹시 희망하여 그 할머니와 로센바움 국장과의 만남을 내가 주선하였던 것이다. 워싱턴의 미 법무부 그분의 집무실에서였다. 차마 인간으로서는 겪을 수 없는 참혹한 비극 속에 어린 소녀시절의 꿈을 처참하게 짓밟힌 그 할머니의 이야기, 그 실화를 본인에게서 직접 전해들은 우리 모두는 마치 폭탄을 맞은 듯 숨소리마저 송구스럽게 느껴지기만 하였다. 갑자기 세상이 머문 듯, 침묵의 시간이 꽤 흘렀었다.
얼마가 지난 후, 유리컵에 냉수 한잔을 떠서 손수 할머니에게 갖다드리고 나서 할머니를 정중하게 껴안아드린 후 로센바움 국장은 이렇게 할머니에게 말을 하였다. 내게 딸이 둘이 있습니다. 지금 여섯 살과 여덟 살입니다. 그 애들이 커서 먼 훗날에 숙녀의 나이가 되면 나는 그때에 할머니 이야기를 내 딸들에게 들려줄 것입니다. 그리고 부탁을 이렇게 할 것이에요. ‘우아한 숙녀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만난 할머니처럼 영예와 자존심을 소중히 여기는 훌륭한 인간으로 자라줄 것’을 꼭 당부할 것입니다.
나는 가슴속에 눈물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대문제를 에워싼 정의 회복운동을 펼쳐 나가면서 국제적으로 겪은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특별히 일본의 정신대문제 반대운동가들에게 겪은 고통이 한꺼번에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듯 느꼈다. 아, 우리나라 정부 관리 중에 로센바움 국장 같은 분이 몇 분이나 있을까 하는 아쉬움에 한동안 환상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멋있는 분을 내 평생에 만날 수 있었다는 일이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금년에 로센바움 국장의 큰딸이 아마도 열여섯 살 되는 해이겠다. 그녀는 아빠에게서 할머니 이야기를 듣겠지. 그리고, 미국에 a lady of honor and pride가 또 하나 탄생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할머니를 만난 적도 없는 나의 소희에게는 어떻게 a lady of honor and pride에의 다리를 놓아줄 수 있을는지 걱정이 태산 같다.
소희가 열여섯 살이 되는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나는 왜 이리 설레기만 하고 있는지. 내가 열여섯이 되는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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