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에 반하고 향기에 취한 ‘멋진 만남’
남가주 서울고 산악회 동행기
줄 맞춘 포도나무들이 언덕의 결을 따라 끝 간 데 없이 팔을 뻗고 있다. 옆으로 누운 여인의 곡선처럼 부드러운 포도밭의 능선이 눈을 지나 마음을 핥는다. 오래된 참나무, 감람나무, 과실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선선한 미풍. 4계절이 아름다운 샌타바바라는 특히 봄이 눈부시다. 새롭게 옷 갈아입은 신록의 들판과 푸른 나무들, 군데군데 물감 뿌려놓은 듯 채색된 야생의 봄꽃들이 소곤소곤 말을 걸어온다. 공기에도 바람에도 생명이 넘치고, 모든 풍경은 그 자체로 평화. 한가한 시골길은 굽이굽이 나른하고 겸손한 풍경을 내보인다.
포도나무 줄기마다 벌써 초록 잎이 파랗게 돋았다. 겨우내 쉬었던 땅을 매만지고 나무를 손보기 시작하는 시즌. 올 한해도 최고의 수확을 이루는 최고의 빈티지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포도원 일꾼들은 설레기 시작한다.
<버튼우드 와이너리의 입구>
6시간동안 와이너리 5곳 돌며 시음·점심까지
4월의 둘째 토요일, 샌타바바라로 와이너리 피크닉을 다녀왔다. 와인과 친구, 자연과 길 떠남을 좋아하는 사람들 ‘남가주 서울고등학교 동창회 산악회’(회장 양철수)와 함께 한 단체 일일여행.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 동행이라 낯익고, 반가운, 그래서 더 맛있고 즐거운 소풍이었다.
총 43명이 대절버스를 타고 아침 7시에 떠나 저녁 7시30분에 돌아왔으니 꼬박 한 나절을 함께 보낸 셈이다. 오며가며 6시간을 빼고, 남은 6시간 동안 와이너리 다섯 군데를 돌고 점심까지 거나하게 먹었던, 알차고도 여유 있는 일정이었다.
<맨 처음 들른 선스톤 와이너리에서 회원들이 자유롭게 시음하고 있다>
이날 우리가 방문한 와이너리들은 선스톤(Sunstone), 버튼우드(Buttonwood), 리도(Rideau), 라펀드(LaFond), 그리고 폴리(Foley)였다. 각 와이너리에서 시음하는 시간을 거의 한 시간씩 잡았으나 동작 빠른 한국 사람들, 테이스팅에 미처 10분도 안 걸린 것 같았다.
하지만 와이너리 여행에서의 주의점은 너무 빨리, 너무 많이 다니지 않는 것. 취기도 문제지만 시간과 여유를 갖고 음미해야 할 와인과 대화, 포도원 풍경과 테이스팅 룸 분위기 같은 것을 즐기지 않고 빨리 빨리 돌아다니기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고 산악회 가족들이 라펀드 와이너리의 오크통 숙성 창고에서 테이스팅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놓고 ‘낮술’ 한다고 다들 멋쩍은, 그러나 엄청 즐거운 표정들을 지었다. 음주운전 걱정이 없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한가. 평소 술을 전혀 안 마신다던 사람들도 남들이 마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동하는지 다들 글래스를 하나씩 잡고 단체로 하루 종일 낮술을 하였다.
와이너리 여행의 전리품은 와인 글래스. 샌타바바라에서는 거의 모든 와이너리들이 자기가 시음한 와인 잔을 공짜로 가져가게 하고 있는데 댑분 리델(Riedel) 글래스를 주기 때문에 시음비(약 10달러)가 아깝지 않은 수확을 챙겨올 수 있다. 부부가 나들이한 경우 이날 하루 다섯군데서 10개의 글래스를 가져왔던 것이다.
점심식사는 네번째 들른 라펀드 와이너리에서 먹었다. 이 와이너리가 샌타바바라의 스테이트 길에 운영하고 있는 식당 ‘피에르 라펀드 비스트로’(Pierre LaFond Bistro)에서 직접 공수해 온 일인당 30달러짜리 부페 런치였는데 맛이 상당히 좋아서 다들 흡족하게 식사했다.
메뉴는 구운 닭고기(Roast Chicken with Caramelized Pears, Orzo Pasta with Basil Pesto), 샐러드(Baby Arugula Salad with Enoki Mushrooms & Mimosa Egg in a Raspberry Vinaigrette), 가지요리(Eggplant Cannelloni), 생선요리(Grilled Kahuna Tri-Tip), 세 종류의 토티야 랩, 디저트 플레이트 등.
<와인 테이스팅은 여자들이 더 좋아한다.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서울고동문 아내들. 맨 왼쪽이 김성호씨의 아내 김혜경씨.>
와인 한모금, 낭만 한모금, 술술 넘어가네
남가주 서울고등학교 동창회 산악회는 샌타바바라 와이너리 단체여행이 이번으로 네 번째다. 한인들 사이에 흔치 않은, 그리고 예약과 일정 짜기가 결코 쉽지 않은 와이너리 소풍을 동문가족들이 모두 즐기게 된 것은 전 회장 김성호·혜경씨 부부의 특별한 활약과 배려 때문이다.
소문난 와인 애호가인 김성호씨 부부는 마치 샌타바바라가 자기 집 뒷마당이라도 되는 양 지난 10년 동안 거의 매 주말마다 놀러 다녔던 전력을 자랑한다.
때문에 샌타바바라의 와이너리란 와이너리는 안 가본 데가 거의 없고, 두 사람이 즐겨 다니는 곳에서는 항상 VIP 취급을 받고 있으며, 와인클럽 멤버십을 갖고 있는 곳만도 다섯 군데, 심지어 김(Kim)씨 성을 가진 한인이 테이스팅하러 오면 “김성호 친구냐?”고 묻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 내공이 쌓여 단체 시음 예약이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와이너리라는 곳이 단체로 다니기에 좋은 여행지는 절대 아니다.
<봄 내음이 가득한 샌타바바라 비녀드>
테이스팅 룸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지만 보통 두세 명, 많아야 서너 명씩 들러 시음을 하며 담소하는 ‘격조’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때문에 수십 명이 우르르 들이닥치는 단체 시음을 와이너리 측에서 반길 리 없다.그런 이유로 이번에도 다섯 군데 예약하는 일에 무척 애를 먹었다고 김성호씨는 전한다.
지난해만 해도 이번보다는 용이했는데 갈수록 더 힘들어지는 이유가 와인 붐으로 해마다 샌타바바라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한다.
<리도 와이너리의 전경>
와인 붐으로 단체손님 안 받거나 엄격 제한
단체를 아예 안 받는 곳도 있고, 받기는 하되 시음비를 더 받거나 도착시간과 인원수를 까다롭게 요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예 단체 시음객 유치로 성공한 와이너리도 있다.
이날 세 번째로 들른 리도(Rideau)의 경우 원래 너무 한산하고 영업이 안 되던 곳이었는데 몇 년 전 단체 유치를 시작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이 날도 도착하니 먼저 와 있는 흑인 단체 수십명이 어찌나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시간별로 손님 받는 관광지 식당처럼 소란해서 이게 와이너리인지 돗대기 시장인지 구분이 잘 안 될 정도였다.
이번 여행의 회비는 일인당 50달러. 점심식사와 교통비가 포함된 것이고, 와이너리에서의 테이스팅 비용은 각자 냈다. 시음한 와인을 구입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물론 각자 지불.
총무 옥기철씨에게 물어보니 대형버스 대절 요금이 하루 800달러, 운전기사 팁이 120달러였다. 43명의 점심식사 비용에 음료와 스낵 등을 합해 보면 분명 적자 운영이었는데 ‘독지가의 후원’으로 충당했다고 귀띔했다.
<샌타바바라의 VIP 김성호씨가 식사중인 테이블을 찾아다니며 와인을 따라주고 있다>
샌타바바라 유명 와이너리
샌타바바라는 LA에서 두 시간 거리로 비교적 가깝고 경치가 아름다우며 솔뱅, 롬폭 등 유명 관광지들이 가까이 있어서 하루 이틀 부담 없이 다녀오기 좋은 여행지다. 와인 산지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 해변 쪽이 아니라 내륙 쪽으로 형성된 산과 계곡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계곡에 올라오는 안개, 따뜻한 햇살, 미네랄이 풍부한 토양 등 샤도네와 피노 누아 재배가 잘 되는 환경이다. 요즘 들어 시라의 재배도 늘어나고 있으며 지난해에 나온 영화 ‘사이드웨이즈’(Sideways) 덕분에 아직도 관광 특수를 누리고 있다.
샌타바바라의 와인 산지는 4개의 구역(Santa Maria Valley, Los Alamos Valley, Santa Ynez Valley, Santa Rita Hills)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구간 안에 100여개의 와이너리들이 산재해 있다. 와인의 맛으로 볼 때 아직 나파 밸리나 소노마 카운티, 파소 로블스 만큼은 못하지만 피노 누아 만큼은 상당히 잘 만드는 와이너리들이 있다.
<서울고동창회 산악회 현 회장 양철수씨와 전 회장 김성호씨>
추천할 만한 와이너리들은 알마 로사(Alma Rosa), 라펀드(Lafond). 뱁콕(Babcock), 멜빌(Melville), 샌포드(Sanford), 클로스 페페(Clos Pepe), 히칭 포스트(Hitching Post), 시 스모크(Sea Smoke Cellars), 피들헤드(Fiddlehead Cellars), 폴리(Foley Estate), 팍슨(Foxen), 자카 메사(Zaca Mesa) 등이다.
메리디안(Meridian), 바이런(Byron), 앤드루 머리(Andrew Murray), 파이어스톤(Firestone) 등도 많이 알려진 곳들이다.
<단체로 낮술한 사람들. 와이너리 여행을 다 마치고 서울고동창회 산악회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글·사진 정숙희 기자